[한겨레 토요판] 가족
아빠의 외도, 딸의 속앓이

▶ 내 집 장만에 성공한 날, 성실한 회사원이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만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첫사랑을 만나고, 딸은 아버지의 친구와, 아들은 불량소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야말로 막장 가족이죠. 일본 만화 <행복한 시간>이 그린 가족입니다. 흘러간 유행가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 네 인생은 너의 것”이라고 쿨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가족이란 게 어디 그런가요. 나도 행복하면서, 가족도 행복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어디 없을까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김현지(가명·21)씨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표현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지씨는 아버지, 어머니, 고등학생인 여동생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아빠는 겉으로는 무뚝뚝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현지씨와 동생을 생각하는 분이었다. 한 번은 퇴근길에 현지씨에게 전화해서 ‘먹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물음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답하자, 양손 가득 검은 비닐봉지에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회식을 하고 얼큰하게 취한 아빠가 딸의 대답만 생각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엄마는 그런 아빠 곁에서 내조의 여왕으로, 자식들에게는 헌신적인 어머니로 평생을 살아왔다. 특별하진 않아도 평범하고 화목했던 현지씨의 집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주말 오후, 별생각 없이 집어 든 아빠의 휴대전화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미심쩍은 문자메시지들이 남아 있었다. ‘자기’, ‘오빠’ 등의 호칭을 사용하며 아빠에게 친근하게 문자를 보내오는 여자. 평소 현지씨 문자에도 답장을 잘 하지 않던 아빠가 그 여자의 메시지에는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오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다시 봐도 이건 명백한 바람이었다.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벌어져 있었다. 평소에 아빠를 믿고 따랐던 만큼 현지씨가 받은 충격도 컸다. 가족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갔다. 태연하게 움직였지만 심장이 뛰었다. 처음에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아빠가 어떻게 나한테, 엄마한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눈물이 났다. 이런 아빠 때문에 우는 자신이 싫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부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동생에게는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아빠와 대화를 해봐야 하는지 혼자 판단하고 행동을 취하기에는 버거운 사건이었다.

휴대전화 속 수상한 문자메시지
배신감 뒤엔 ‘어떻게 하나?’

고민 끝에 엄마에게 털어놨죠
돌아온 말은 “모른 척해”
이해는 못해요
하지만 두 분께 시간을 줄래요

“아빠의 부인은 엄만데, 엄마가 이런 일을 모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며칠을 혼자 고민에 빠져 있다가 엄마에게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조심스럽게 아빠의 휴대전화에 이상한 문자메시지가 온 걸 봤다고 알렸다. 충격을 받지나 않을지 걱정됐다. 엄마의 반응은 의외였다. 며칠간 혼자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엄마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생도 알고 있는지 묻더니, 오히려 ‘모르는 척하라’는 거였다. 상대는 엄마도 아는 사람이었다. 아빠의 거래처 사람이라고 했다. 문자메시지를 보고 추측만 했던 아빠의 외도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혼란이었다. ‘왜 외도를 알면서 이혼하지도, 언성을 높여 싸우지도 않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같이 사시는 걸까?’ 엄마는 바보냐고, 왜 가만히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하는 말들이 엄마에게 더 상처가 될까봐 마음이 쓰였다.

엄마와 얘기를 나누고 며칠 뒤, 아빠가 약간 술에 취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빠는 술을 마신 날이면 유독 현지씨와 동생에게 애정표현을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 가득 짓고 “아이고 우리 딸~” 하며 안아 오는 아빠의 행동에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엄마의 당부가 있어 마음속에 차오르는 짜증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냉정하게 얼른 주무시라고 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에만 평화로운 휴전국 같은 상황이 되었다. 아빠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워 보였다. 가족들에게 잘하는 모습을 봐도 가식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는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 가서는 우리 가족보다 그 여자를 더 아끼고 사랑할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시간이 조금 흘러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주변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아빠의 행동에 분노했고, 엄마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현지씨는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현지씨가 기억하는 엄마는 드센 아빠에게 늘 져주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가부장적인 성격이 강한 아빠 곁에서 평생을 묵묵히 살아온 분이었다. 부부싸움을 해도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는 반면 엄마는 조용히 얘기를 듣고 시간이 지난 뒤에 아빠에게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스타일이었다. 엄마는 아마도 가정을 시끄럽게 하지 않는 범위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찾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엄마의 뜻대로 조금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 사람들 중 몇몇은 처음의 현지씨처럼 직접적으로 행동을 하고 일을 해결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려 봐도 자녀 입장에서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상담사는 “외도의 문제는 아빠와 자녀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녀의 입장에서 받은 상처를 묵인하라는 말은 아니다. 아빠의 외도는 분명히 가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먼저 당사자들이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해결할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좋다. 자녀가 받은 상처나 실망감을 전달하는 것은 그 후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고운/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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