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슬으슬해지면 생각나는 ‘갱시기’

[나는 농부다] 숨쉬는 제철밥상

추워지려고 그러겠지, 해가 들어가고 바람만 불어 쌀쌀하다. 날이 이리 으슬으슬하니 집 안에 들어앉았고, 그러다 보니 먹는 생각만 난다. 오늘 점심은 뭘 해 먹을까?

“이렇게 으슬으슬한 날에는 갱시기가 최고야.” 남편이 ‘갱시기’ 노래를 하다가 고향집 어무이께 전화를 한다. 손전화 시대, 어머님은 마을회관에 계신다. 모자간에 갱시기 이야기를 하니 곁에서 듣던 다른 할매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는 소리가 손전화기를 타고 들린다. “아, 갱시기!” “갱시기가 왜 갱시기냐고? 개밥 같다고 갱시기지.” “그거 참 구시지(구수하다).”…

어머님께 조리법을 전수받은 남편이 도전해 본다. 냄비에 김치 썰어 찬밥과 마른국수를 넣고 끓인다. 남편이 끓인 그 추억의 갱시기! 아뿔싸, 마른국수 가락이 국물을 다 빨아먹어 걸쭉한 죽처럼 되었다. 선뜻 손이 안 가지만 정성을 생각해 한 입 두 입 먹어보니 맛있다. 푹 끓인 김치와 밥이 어우러진 맛에 제물에 끓여 푹 퍼진 국수 맛이 일품이다.

며칠 뒤 다시 날이 흐리고 쌀쌀하니 나도 갱시기가 생각난다. 남편이 읊조리던 노래를 들어보면 김치에 찬밥 넣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넣고 푹 끓이면 되더라. 넣을 만한 걸 이것저것 찾아 쭉 늘어놓았다. 남편이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와 장단을 맞춰준다. 국수 삶는 커다란 냄비를 꺼내 멸치 다시마를 넣고 국물을 넉넉히 잡아 팔팔. 신 김치부터 넣는데 좀 적게. 김치를 많이 넣으면 갱시기가 아니라 김칫국이 돼 오히려 무를 좀 삐져서 넣으면 시원하지. 이번에는 찬밥. 절대 많이 넣으면 안 돼. 맞아, 앞으로 들어갈 게 많으니까. 고구마도 썰어 넣고, 냉장고에 돌아다니는 굳은 가래떡도 넣고, 이번에는 국수까지. 계속 불을 세게 때며 팔팔 끓이니 이것들이 웬만큼 퍼졌다. 이제 콩나물 한 줌을 넣고 뚜껑을 잠시 닫고, 콩나물이 익으면 간은 새우젓으로 맞추는 게 좋겠지? 마지막으로 대파 쏭쏭.

다 끓이고 보니 어째 현대화된 갱시기다. 한 대접 뜨면서 남편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 퍼먹으면 꿀맛이었는데….” 그건 그렇지. 이맛 저맛보다 배고픈 맛이 최곤데. 뛰놀다가 따뜻한 국물에 건건이를 함께 먹으면 몸이 확 풀리며 얼마나 맛있었을까?

갱시기, 갱죽, 부산 김치국밥 다 비슷하게 김치와 찬밥을 넣고 푹 끓인 서민들의 국밥이다. 김치와 찬밥은 꼭 들어가지만 나머지는 그때그때 있는 건 넣고 없는 건 빼면 된다. 국수 대신 수제비를 넣으면 별미리라. 남편의 노래 2절에는, 라면이 처음 나와 귀할 때 일곱 식구 갱시기 한 솥에 라면을 하나 넣고 끓여 서로 라면 한 가닥이라도 더 먹으려고 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추운 날, 있는 거 없는 거 다 넣고 푹 끓이는 국밥. 이거 좋구나. 전날 술 한잔 한 뒤라면 이만한 술국이 또 없으리라. 우리 아이들의 추억의 음식은 무어가 될까? 밥 먹는 아이들을 슬그머니 돌아본다.

장영란 <숨쉬는 양념·밥상> 저자


(*한겨레신문 2013년 11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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