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들여온 빨래대에 붙어있던 시든 나뭇잎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선율이가 그걸 보고 벌레인 줄 알고 피하길래 손으로 집어서 선율이 몸 가까이 가져가며 장난을 쳤다.
그런데 선율이가 표정이 싹 바뀌더니 옆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빠가 무섭게 했다고 화가 난 것이다.
난 무안하고 미안해져서 선율이에게 가서 "선율아, 벌레인 줄 알고 무서웠어? 그래서 화났어?"하고 물었다.
선율이는 뾰로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싫어. 말 안 할 거야."하며 토라졌다.
"아빠가 미안해. 장난으로 한 건데 무서웠어?"해도 묵묵부답, 화가 잔뜩 나있다.
"선율아, 그럼 기분 좋아지면 거실로 나와. 아빠가 그때 안아줄게."
"싫어. 기분 안 좋아. 안 나갈 거야!"하고 소리친다.
난 '시간이 지나면 기분이 좀 풀리겠지' 생각하며 거실로 나왔다.
크기변환_선율(용서).JPG
(맨 오른쪽이 선율이. 작년 12월 사진)

동생이 아빠한테 화난 걸 알게 된 신영이가 선율이한테 가서 동생을 달래주려고 이말 저말 해보는데도,
선율이는 기분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뒤에는 아내가 가서 
"선율아, 아빠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선율이가 기분 풀고 아빠한테 안아달라고 하면 어때?" 해도
여전히 선율이는 요지부동이다.
그래도 아내는 계속 선율이를 설득해보려 한다.
"선율이가 자꾸 그러면 아빠가 더 미안해 하잖아."

난 거실에서 아내와 선율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아내의 이 말을 듣고 당황스러웠다.
아니, '당황스럽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느낀 그 당황스러우면서도 난감하고, 먹먹한 그 감정은 뭐였을까?
방금 상황에서 선율이는 화가 잔뜩 나 있었는데, 
엄마가 와서 '아빠가 사과했으니 아빠가 더 미안해지지 않게 이제 그만 기분 풀어.' 하면서 
선율이에게 아빠를 용서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선율이는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용서'를 권유받았다.
내가 느낀 복잡미묘한 감정은 이때 선율이가 느꼈을 감정을 상상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율이는 화난 감정을 충분히 느낄 자유마저 빼앗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선율이를 두 번 울리는 일인 것 같았다.
선율이의 기분을 생각하다가 그만 아득해졌다.
아빠가 장난친 걸로 놀라고, 기분이 상해있었는데, 
엄마까지 나서서 기분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아빠 기분을 생각해서 그만 기분을 풀라고 하고 있으니...

날 돕기 위한 아내의 개입으로 선율이의 기분은 더 상했고, 상황은 더 꼬였다.
어쨌든 선율이에게는 놀라고, 화난 데다 억울함까지 더해진 감정들을 느낄 만한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기다렸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선율이는 거실로 쭈뼛쭈뼛 걸어나왔다.
얼른 선율이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나: "선율아, 아까 아빠가 나뭇잎으로 장난쳤을 때 놀라고 무서웠지?"
선율: "..."(고개를 끄덕인다.)
나: "많이 속상했겠다. 아빠가 미안해. 그냥 재미있자고 장난친 건데, 선율이가 그렇게 무서워할 줄 몰랐어."
선율: "..."(침묵. 하지만 맨 처음과 달리 내 이야기를 듣는다.)
나: "그리고 선율이 화 나 있는데, 엄마가 선율이한테 '아빠가 사과했으니까 너도 기분 풀어.' 했을 때,
더 화났을 것 같아. 억지로 기분 풀라고 해서 말이야. 그랬어?"
선율: "... 으앙~흑흑."(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했는지 선율이가 서럽게 운다.)
나: (안아주며) "그랬구나. 선율이 많이 화 나고 억울했겠다."
상황을 지켜보던 아내도 다가와 선율이를 안아주며 사과했다.

사소한 장난으로 시작된 일이 이렇게 커졌다가 결국 마무리되었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이 일을 통해 용서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흔히 용서는 자신까지 상하게 하고 마는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게 해준다지만, 
용서의 행위를 강요하는 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에게는 억울함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느끼고,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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