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들썩일 때도 굳이 책을 찾아 읽지는 않았는데, 한해 독서목록을 공유한 후 <소년이 온다>를 추천(어른아이님) 받았다. 동네 독서모임 사람에게 <소년이 온다>를 읽어볼까 한다고 했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너무 힘들 것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
토요일 오후 동네 도서관에 아이가 빌려온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결국 이 책을 빌려 왔고 밤이 되기 전 다 읽었다. 생각보다 덤덤하게 읽을 수 있었는데, 읽는 동안 발포명령을 내리고 전달하고 수행했던 그때 그 군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해 졌다.
1979년. 광주에 살았고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소풍날 아침 뉴스에서 박정희 사망 소식을 접했다. 1980년. 5월이 되기 전 우리가족은 벌교로 이사를 했고 5월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직업군인이셨던 친정아버지는 비상으로 며칠에 한번 잠깐 집에 들르셨는데 그런 아빠에게 잘 다녀오시라 인사를 드리고 아쉬움에 다시 아빠에게 달려가며 “마지막으로 아빠한테 인사 한번 더 해야지” 했다가 엄마한테 엄청나게 혼났다. “마지막이라니!!! 그게 지금 아빠한테 할 소리야?!!!”
어느 날. 폭도들이 벌교로 내려오는데 경찰과 군인가족은 찾아내서 해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학교는 하루인가 이틀인가 휴교를 한 상태였고, 마침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던 외할머니는 “나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할 터이니 너희들만 피해라. 설마 힘도 없는 노인네를 어떻게 하기야 하겠냐?”하셨다. 외할머니와 대성통곡을 하며 이별을 하고 엄마와 동생들과 집을 나와 동네사람들과 같이 길가에 서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다들 집밖에 나와 줄지어 서 있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벌교로 오는 길목에서 보성 사람들이 폭도들에게 따뜻한 목욕과 음식을 마련 해 주면서 설득을 했고 폭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광주로 돌아갔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되어 광주를 찾았을 때 군인아파트에 같이 살았던 친구들은 봄에 못한 수업 때문에 방학도 거의 없다고 했다. 5월엔 군인아파트를 떠나 부대 내 막사로 피신해 있었다고. 엄마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 중 “핏물이 철철 흘러 넘쳤다 더라”는 얘기도 들었으나 되물어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 광주의 폭도들이 폭도가 아니었다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1988년. 선배들이 가르쳐준 몇 곡의 노래 중 유독 잔인했던 그래서 따라 부르고 싶지 않았던 노래.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그 무렵 전철역에서 허공을 향해 전두환에 대한 욕을 끊임없이 쏟아내던 정신 줄 놓은 사람도 나는 이 책 <소년이 온다>를 읽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야. 겨우. 조금 제대로. 노래가사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잔인한 짓이었다는 것을.
우리 군인이 우리를 향해 총을 쐈어. 우리 군인이. 그런 일을 겪고 고문을 당하고 자식을 형제를 친구를 잃고 다들 어떻게 살아 왔을까? 살아 냈을까?
한번 용기를 내어 친정아버지께 광주 이야기를 여쭈었으나 “모른다”하셨다. 알고도 모른다 하시는 것인지 정말 모르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아버지가 광주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터.
그때 광주에서 발포명령을 내리고 다시 그 명령을 하달하고 발포를 하고 시신을 수습했던 그 군인들. 저항하는 시민들을 빨갱이라고 폭도들이라고 굳게 믿었을까? 지금까지도 그렇게 믿고 있을까? 그렇게 살아 왔을까? 그들의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진다.
강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