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심었다고 글을 올린 게 5월 15일인데 눈깜짝할 사이에 고추 수확이 한창입니다.
시간이 날아가다 못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 같아서
중간에 어땠는지 잘 기억도 안 나네요.
오늘은 아지매 10분이 오셔서 고추를 따셨습니다. 아지매들은 아침 6시부터 (!)
오후 6시까지 일을 하십니다. 아침, 점심, 오후 참을 드시는 시간 말고는 하루 온종일
밭에서 고추를 따십니다. 식사는 저희가 준비하는데
이런 일에 베테랑이신 어머님도 인원이 많아지니 좀 힘들어 하십니다.
우리 가족들까지 16인분의 식사를 세 번 차려야 하니까요.
아침 준비해서 먹고 치우고나면 점심 준비해야 하고, 점심 설거지 하는 동안
오후 참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는 어머님, 저는 설거지와 뒤치닥거리 담당입니다.
시골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16인분 설거지 하고나면
내가 이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오면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져서 SNS에 마구 올리고
베이비트리에도 올리고... (별게 다 자랑 ^^;)
어머님과 제가 부엌에서 일하는 동안 남자들은 아지매들이 따신 고추 포대를
옮기고 포대에 있던 고추를 잘 선별해서 세척하고 건조하는 일을 합니다.
건조기에서 1차로 건조시킨 후 하우스에서 햇볕에 다시 말리는 과정을 거치는데
햇볕이 좋으면 2-3일이면 되지만 요새처럼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면 기약이 없습니다.
건조기에서만 말리면 화근, 건조기에 들어가지 않고 햇볕에서만 말리면 양근(일명 태양초),
저희처럼 건조기와 햇볕에 같이 말리면 반양근 고추입니다.
» 건조기에서 나와 하우스에서 잘 말라가는 고추. 모판에 씨 뿌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수확을 했습니다.
이런 일상 속에서 귀농 후 첫 수확이라는 감상은 이미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가버린지 오래.
남편은 저녁에 일을 마치고 씻고 나면 아무 것도 못하고 픽픽 쓰러져 버립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파도 아침이 되면 또 일하러 나갑니다. 그래도 버티는 건
겨울에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내 맘대로 놀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 입니다 ^^
남편이 농부를 직업으로 택한 가장 큰 이유가 겨울에 놀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이제 그 겨울이 다가오니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즐겁게 일할 수 있다더군요.
형민이는 형제도 없고 주위에 또래 친구도 없지만 시골 고추밭에 오면
마음껏 뛸 수 있어서 좋답니다. 오늘같은 일요일에 모두 바쁘면 혼자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빠도 도와주고 엄마 심부름도 하고 빨간 토마토가 있으면 따 먹기도 합니다.
나중에 커서 형민이 마음 속에 어떻게 기억될 지 모르지만
이렇게 모든 가족들이 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 저는 참 좋습니다.
(요기는 광고 ^^;;)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수확한 고추를 판매합니다. 청정 봉화에서 생산된 건고추와
고추가루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 블로그로 오셔서 정보 확인해 주세요.
귀농 첫 해라서 그런지 아직은 좋기만 합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야외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밥 먹으라고 부르러 갈 때면
참... 뭐랄까, 옛날 밖에서 놀 때 부르러 오시던 엄마가 된 것 같습니다.
요새는 아이들만 밖에서 놀게 하기가 겁나서 엄마가 꼭 붙어 있으니 그럴 일이 별로 없는데
이렇게 밥 먹으라고 부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새삼스럽습니다.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언젠가부터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하구요.
가족과 일상, 가장 기본적인 것들로 돌아가는 귀농 생활 입니다~
» 호시탐탐 아빠모자를 노리는 형민군. 일하는 아빠가 멋있다며 빨리 어른이 돼서 아빠처럼 일하고 싶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