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네다섯살 때쯤의 일이다. 만나면 “왜 왔냐”고 싫은 티를 확 내고, “집에 가라”로 타박을 주고, 주변 사람들한테 “고모 싫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둘도 없는 ‘조환녀’(조카 환장녀)인 내겐 충격이었다.

“고모가 왜 싫어?”라고 애타게 물어도 눈길을 피하던 조카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툭 던지듯 말했다. “고모는 왜 ‘안 돼!’ 그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순간 멍했다. 내가 애정과 관심으로 조카를 돌봤던 행위가 조카한테는 자신을 방해하는 귀찮은 행동일 뿐이었던 것이다. 에어컨 통풍날개가 신기해서 만지려고 하면 다칠까봐 “안 된다”고 하고, 전화기 버튼 소리가 재밌어서 누르면 엉뚱한 곳에 전화가 걸릴까봐 또 “안 된다”고 하고, 컵을 들면 담긴 커피를 흘릴까봐 컵을 뺏었던 것이다.

아이는 자신만의 호기심을 따라 세상을 배워 나가고 있는데 어른의 시선으로 무조건 안 된다고만 했으니 짜증과 화가 난 것이다. 그 후로는 조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두었다.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서는 물건을 살짝 치워 놓거나, 다치지 않게 뒤에서 잡아주기만 할 뿐 말리지 않았다.

방해하지 않았더니 조카는 개울가에 앉아 나뭇가지 하나로 한 시간을 재밌게 놀고, 할머니의 화장품 샘플로도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자신의 감정이 방해받지 않아서인지 얼굴은 편안하고 밝아졌고, 고모를 다시 환영해주었다.

그랬던 조카가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에 들어가니 다른 차원의 일이 생겼다. 공부와 숙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조카를 돌보러 가면 영어와 수학 등의 공부도 봐줘야 하는데,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조카와 그날 해야 할 분량을 마치게 해야 하는 나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얼마 전 책상 앞에 억지로 앉아 있던 조카가 한마디를 던졌다. “고모는 왜 고모 마음대로만 하려고 해?”

그러고 보니 나는 또 조카가 갖고 있는 자신만의 마음의 흐름을 무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 실랑이하다 지쳐 공부 가르치는 걸 포기했다. 조카는 방으로 들어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직전 모습과 딴판으로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그러더니 방을 나와 가만히 책상 앞에 앉는 것이 아닌가. “공부 하고 싶어?”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딴짓도 별로 하지 않고 20여분 만에 그날 해야 할 영어 공부를 모두 마쳤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먼저 하고 싶었고, 하고 싶은 일을 만족스럽게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공부도 저절로 하고 싶어지는 것을 어른들은 어른의 시선과 욕심대로 아이들을 무조건 당장 책상 앞에 앉히려고만 한다. 그래서 아이는 기분이 나빠지고 공부도 하기 싫어지며, 어른은 어른대로 지치고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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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리(심플라이프 디자이너)
어른들은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아이들은 “제발 방해만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외치고 있는지 모른다. 아이가 마음의 소리를 따라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어른들은 그 호흡을 지켜보며 알아봐주고 약간 거들기만 하면 되는 것을.

휴리(심플라이프 디자이너)


(*위 글은 2015년 1월 21일자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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