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봄소풍 때 남편이 찍어준 가족사진.

[한겨레 토요판] 가족관계 증명서

나의 반쪽 반선생님에게,

20여년 전 당신이 숱하게 써줬던 연애편지에 한번도 답장을 안 썼는데 우연찮은 기회로 이제야 답장을 씁니다. 얼마 전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당신과 클래식 공연에 다녀왔어요. 당신은 취향도 아닌데 마누라 말 들어준다고 따라나섰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요즘 당신은 들어주는 전문가가 돼 가는 것 같아요.

이번 학기부터 학교에서 부장과 담임을 같이 맡게 된 이후로 당신은 부쩍 힘이 들어 보이네요. 담임을 맡은 반 학생 중에 힘들게 하는 아이들이 있다기에 ‘한 2년간 담임을 안 하다 다시 해서 감이 떨어져 그렇겠지. 곧 적응될 거야’ 했는데, 여전히 그 힘든 기미가 잦아들지 않으니 당신의 내적 요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며칠 전, 당신은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생의 아버님으로부터 ‘학교폭력으로 가해 학생들을 고소하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한시간 넘게 받아줘야 했죠. 또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따돌림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 어머니의 하소연도 들어줘야 했어요. 일요일 저녁,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아이가 어제 집에 안 들어왔다’는 학부모의 문자메시지가 계속 들어와 영화도 제대로 못 봤죠. 그뿐인가요. 결석한 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더니 ‘나도 이혼하고 애 데리고 먹고살기 힘들다. 때리든 야단치든 학교에서 알아서 해달라’고 하셨다면서요. 학생 지도 방법은 부모님 세대와 달라지고 있는데 부모님들의 요구는 크고, 학생인권조례 시행으로 제약은 많아지고 있으니, 그 과도기적 시행착오를 당신이 온몸으로 맞춰주고, 받쳐주고, 조율해주는 것 같아요. 마치 우리가 다녀온 ‘한낮의 클래식’ 공연의 첼리스트처럼요.

난 공연 중 ‘송어 5악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그전 곡들에서는 바이올린 소리가 화려했는데 5악장에서는 비올라 소리도 들렸거든요. 비올라는 자기 소리도 크게 못 내고, 바이올린과 첼로를 거들어 벌어진 음역대를 좁히는 역할만 했죠. 또 웅장한 콘트라베이스의 음역과 화려한 바이올린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에 바쁜 첼로도 눈에 들어왔어요. 비올라는 그런 첼로를 돕는 배필이었죠.

그동안 난 당신에게만은 바이올린이었던 것 같아요. 옛날 어른들이 바이올린을 깽깽이라 했다죠. 나 힘든 얘기 들어달라고, 직장에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 당신한테 풀고 깽깽댔던 것 같아요. 이제 난 당신의 비올라가 되려고 해요. 당신 앞에선 내 소리는 조금 더 줄이려니, 당신이 조금 더 말하세요. 커튼콜이 올라간 뒤 앙코르 공연된 첼로 주연의 ‘백조’ 연주처럼요. 당신의 반쪽이가 드림


▶ 가족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속 얘기를 사진과 함께 원고지 6장 분량으로 gajok@hani.co.kr로 보내주세요. 채택된 사연에는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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