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지만 난 매년 스물 대여섯 명의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
일 년 동안 교실에서 복닥거리다 헤어진다.
낯 익히는데 한 달, 친해지는 데 두어 달, 정들고 티격거리는데 두 어 달이면 방학을 맞는다.
개학 후 며칠 간은 또 서먹하다가 친해지고 씨름하다보면 학년말이다.
학년말 즈음이면 비로소 아이에 대해 제법 알게 되고 조언도 가능해진다.
정도 들도 좀 더 알만 하면 어김없이 담임이 바뀌는 학제시스템이다보니
정작 같이 지낼 때보다 헤어져 서로 다른 교실에서 지내면서 오가다 만나면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그동안 내가 얼굴과 이름을 알았던 아이들이 몇 이나 될까 헤아려보니 꽤나 아득한데
사실 난 사람을 만나 사귀는 것에 아주 미숙하다. 외향적이지 못한 성격도 그렇겠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보다는 익숙한 것들에 대한 편안함을 더 좋아해서일게다.
이런 내게 매년 서로 다른 아이들을 사귀고 정 붙였다 또 정을 떼는 일은, 아, 고역이다.
사귀는 걸 잘 못하니 헤어지는 것 또한 어색해서
알던 사람과 헤어지면 뒤끝이 오래간다. 무슨 성격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올해 난 열 살, 3학년 짜리들을 만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의례 자기 소개시간을 갖는다.
또다시 기억난다, 새 학년이 되어 모든 것이 날 긴장시키던 어린시절 학교 새 학년 그 첫날이.
그 와중에 새로 온 담임께서는 한 명씩 나와 자기를 소개하라고 하셨다.
살면서 소개를 한 적도 별로 없던 나는 도대체 뭘 소개하라는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당시 우리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어 친구들 끼리는 더이상 소개할 것 없이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새학년이 되었다고 소개를 하라고 하시는구나. 선생님은 칠판 앞에 서 계신 채 한 명 씩 나와서
아이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라고 하셨는데 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친구들에겐 소개할 게 없었다.
첫 순서로 지목된 내가 우물쭈물 사색이 되어 가자 담임께서는 형식을 설명해 주셨다.
이름, 별명, 좋아하는 것, 잘 하는 것, 장래희망...
그러나 그 역시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 난 그저 친구들의 일부로 같이 어울려 다녔을 뿐, 무엇을 좋아하는지, 장래희망이 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떠오른 것이 귤장사였다. 귤을 많이 먹고 싶어서 어쩌고저쩌고...
나로 하여금 장래희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고민하게 했던 그 분이 난 학기초면 더 떠오른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 미숙하다.
그래서 요즘 교실에서는 종이를 하나씩 주고 간단히 소개 할 내용을 적어 본 뒤, 앞에 나와 친구들에게 소개를 하도록 한다.
그 중에서도 난 장래희망을 꼭 넣어 주기를 아이들에게 부탁한다.
글씨만 본다면 아주 잘 쓴 글씨라고는 못하겠다. 삐뚤삐뚤.
그러나 중간에 찢어진 부분까지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
이 아이는 벌써 몇 번째 썼던 것을 지우고 다시 쓰고 있다.
작고 하얀 손가락에 연필을 야무지게 쥐고 혼신을 다해 글을 써 나가다 마음에 안들면 다시 지우기를
반복하다보니 종이가 찢어지고 말았다. 이 아이의 자기 소개서에 감춰진 열정으로 내가 다 뜨겁다.
큰 종이의 가운데를 비워 두고 아이는 굳이 한 쪽 구석에 자신의 소개를 써놓았다.
자신에 관한 내용을 굳이 구석에 몰아놓은 것을 보니 쓰라고 한 내가 미안하다.
저 아이는 나에게 무엇을 감추고 싶었던 걸까. 담임이 쓰라고는 하니 쓰기는 해야겠고
막상 쓰자니 자신이 쓰는 내용을 담임이 좋아할까 염려가 되었는지
아이는 구석에, 그것도 스스로 테두리를 쳐서 막아 놓았다.
첫날부터 저런 것을 쓰게 함으로써 자신을 고스란히 알아버리려 덤벼 드는 담임에게
순순히 자신을 보여주지는 않겠다는 아이들의 저항이 만만찮은 학기 초.
구석에 자신을 표현한 저 아이가 나와 한 해를 보내면서 자신을 종이 한가운데,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가운데를 향해 자신을 드러내게 키워주고 싶은데
그러기에 내가 과연 알맞은 선생인지 걱정이 앞선다.
난 처음 만난 우리 반 아이들 앞에서 아주 간곡하게 나를 잘 봐달라고 여러 번 부탁을 했다.
"그럼 옛날 얘기 하나만 해 주세요."
토끼가 거북이와 경주를 하다가 어떤 연못에 도착하니 갑자기 물 속에서 로보트 태권브이가 쑥 나오면서
이 금도끼가 네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 도끼를 들고 집에 오다가 도둑을 만나 동굴에 갇혔을 때
알리바바가 와서 열려라 참깨! 하고 열어주었는데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꼬박 두어 시간을 해주고 나서야 아이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사람 마음에 들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래도 상대가 아이들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