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꼭꼭 눌러 쓴 '가수' 라는 장래희망과 옆에 부모가 쓴'선생님'이라고 씌인 장래희망이
얇은 종이 위에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아이는 먼저 부모님께 희망을 써달라고 한 다음,
자신의 희망은 나중에 적었다고 한다. 부모님과 다른 꿈을 가지고 있어서다.
저 아이의 글씨가 오늘따라 애잔해 보이는 건 '사람들 몰래 숨어서' 노래부르는 취미 때문이다.>
저 아이는 똑똑하고 야무지다. 노래를 잘 하는지는 모르겠다.
난 저 아이가 노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저 아이가 야무지게 그린 '빛나는' 마이크를 보니
노래를 아주 잘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겨우 열 두 살. 저렇게 의지가 강한 아이를 만드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부모가 복이 많구나.
저 아이는 늘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 역시 그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아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가수였다니.
난 저런 아이들은 다시 본다.
저 아이 속의 그 어떤 신령이 저 아이의 어느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아이로 하여금 몰래라도 노래를 부르고 싶은 끼를 만들어 낼까.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담임교사는 그 아이의 생활기록부에 그 아이의 진로상황에 대해 기록한다.
6학년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이는 법령에 의한 것이다.
아이의 학적, 성적, 학생생활 등에 관한 모든 것이 망라된 생활기록부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보존된다. 귀중한 자료다 보니 귀중한 곳에 보존되게 마련이다.
만약 학교에 불이 나면 먼저 아이들을 구하고, 그 다음에 생활기록부를 들고 나오고
그래도 여유가 되면 교사들을 구하라고 배웠다.
초등학교 시절에 기록된 생활기록부를 누가 다시 와서 떼어 보련만 매년 학기말이 되면
교사들은 이 서류의 기록에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법에 의해서다.
모든 기록은 근거를 갖춰야 하며 이는 결재라인을 따라 교차확인 된다.
묘한 것은 대다수의 무의미해 보이는 이런 과정이 요식행위에 불과한 듯 보이다가도
한 아이에 대한 기록물을 완성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제법 숭고해진다는 것이다.
문구를 통일하고 사소한 프로토콜에 대한 피로가 항상 뒤따르지만
아이에 대한 몇 쪽의 보고서를 만들어가면서 비로소 나는 그 아이에 대해 뭔가 좀 알아가는 듯 한 것이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가르치는 일로 보낸 회한이나 또는 나무라는 일로 보낸 것에 대한 미안함들이
이 작업을 하면서, 이 나이에도 아직까지 내게 혹시라도 남아 있을,
교사로서 조금의 사명감과 어울려 제법 진지하게 서류를 만들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한방편이면서 또한 이렇게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늘 나의 눈이 무겁다.
오늘은 아이의 진로상황에 대한 면담을 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순서였다.
사전에 조사지를 나눠주고 다시 모은 다음, 아이와 마주 앉아 장래희망에 대하여 상담하는 시간.
어떤 공부보다 중요할 거라는 건 늘 이런 일을 하는 내 생각이고,
모든 학생과 부모의 생각이 꼭 그런 것은 아니어서 상담이 힘들다.
아이도 대충 쓰고, 부모 또한 아직 어린 아이가 무슨 생각이 있을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많다.
아이와 충분한 대화를 해 볼 것을 권유하는 안내문구가 있기는 하지만
당장 눈앞의 내 아이는 이렇게 어리니 부모로서도 진지하기가 힘들겠지.
아이가 장래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일찍 시작하게 해주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양육의 과정을, 부모보다 국가가 더 먼저 앞서 나가는 교육의 효과란... 글쎄.
결국 내가 부모 입장을 대신하며 아이의 황당한 장래희망을 깨주는 수밖에.
“과학자가 꿈이라고? 그럼 과학에 관한 책도 꽤 읽고 있겠구나?
그래, 물리, 생물, 화학, 지구과학 중에서 어느 분야에 관심이 많은 거니?”
“저... 그냥 과학자가 되고 싶은데요... 과학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요.”
난 매정한 현실로 아이를 압박한다. 과학자가 거저 되겠느냐.
그러면 아이들은 막연한 변명으로 한 발 물러선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진로교육은 대부분 이쯤에서 현실과 이상의 접점이 이뤄진다.
피아노는커녕 리코더도 싫어하는 아이가 지드래곤 같은 가수가 되겠다거나
미실처럼 눈빛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겠다면서 우선 엄마 귀걸이부터 몰래 하고 오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사람의 장래라는 것이 어느 한 순간에 책장 넘기듯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하고 관심을 가져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
내겐 수학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난감하다.
맑고 순한 아이들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미래를 야무지게 계획해나가는 걸 보면,
마치 내가 부모도 넘서고, 운명의 신을 밀어제끼고도 모자라
마치 내가 아이를 기르는 듯한 오만한 착각마저 든다. 잘 기르고 볼 일이다.
내가 어릴 때에도 장래희망을 써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난 그럴 때마다 귤장사라고 썼다.
그 당시 친구들 사이에 가장 맛있는 과일은 귤이었다.
리어카에 가득 귤을 싣고 골목을 다니며 팔다가 남으면 내가 모두 먹으리라는 가벼운 희망은
비록 그것이 꿈일지언정 얼마나 달콤한 결핍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