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를 세우며

자유글 조회수 4184 추천수 0 2014.08.05 04:29:05
참깨를 세운다. 그제 30분 동안 쏟아진 100mm 물폭탄에 쓰러진 건 옥수수만이 아니어서 수수는 물 흥건한 욕실 바닥에 나자빠진 요크셔테리어 꼴이고 콩이며 팥은 얼차려받는 훈련병들 꼴로 누워있다. 콩팥이야 바람의 결을 짚고 부스스 일어설 테고 수수며 조는 저희끼리 몸 비비며 일어설 테니 기다릴 수 있지만 참깨는 까탈스런 단독자. 줄기는 외줄기, 마른 땅 좋아하고 질척거리는 건 딱 질색인 차도녀.

하이힐 굽이 부러져 흙탕물에 넘어진 차도녀에게 손 내미는 일은 낭패스럽다. 힘주어 일으키면 깻대가 부러지고 세운 뒤에도 다시 이마를 짚고 비틀거린다. 할 수 있는 건 깻대를 세운 뒤 그저 뿌리 부근을 꾹꾹 다져주는 일. 넘어지며 뿌리를 다쳤을 테니 다시 몸을 세운 뒤에도 며칠 몸살을 앓을 것이다. 깨꽃은 떨어지고 꼬투리는 더디 여물겠지.

농사로 생계를 삼는 일은 해가 갈수록 더 팍팍해질 거란 예감을 어쩌지 못한다. 빗자루로 쓸어놓은 듯 쓰러진 상호네 깨밭머리에 앉아 상호어머님이 말씀하셨다지. 70 평생에 이런 비는 처음이라고. 앞으로 봄과 가을은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 더 덥고 더 춥겠지. 올해처럼 가물거나 폭우, 폭설이 일상화되면 농부가 반 짓고 하늘이 반 짓는 지금의 농사는 애시당초 가망이 없다. 30분 폭우에 풀썩 주저 앉은 내 옥수수가 하필 수확날이었던 것처럼 사과꽃이 환한데 눈 내리고 두물 고추도 아직인데 서리가 내릴 테지. 기후는 해마다 흉폭해질 게 뻔한데 정부는 자동차 팔자고 고추 들여오는 농정을 창조경제랍시지. 가망없는 농사 어쩌자고 나는 농부가 되었을까.

힘이 빠져 밭머리에 앉아 멀거니 눈 둘 곳을 찾는데 허허, 맥없이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폭우 지난지 겨우 하루하고도 반나절. 그 짧은 사이 제 몸을 휘어 일어서는 옥수수며 누가 꺾은 듯 해를 향해 고개를 드는 저 참깨를 보노라니.

- 농부 통신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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