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돈상자를 열다

자유글 조회수 5113 추천수 0 2013.01.05 16:37:53

오전, 대충 청소를 마무리하고 벽에 기대고 앉았다.

내 무릎 위에는 '오늘도 세상 끝에서 외박중'이라는 책이 반쯤 펼쳐져 있다.

어젯밤부터 가속이 붙기 시작해 저자로부터 아마존에 다녀온 얘기를 키득거리며 눈으로 듣고 있는 중이었다. 

큰 애는 컴터 게임에, 밑의 두 녀석은 '꼬마버스 타요' '닌자고'를 보며 저마다의 한가한 토요일 오전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덧 TV속 인기만화는 끝나고 광고방송이 이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두 녀석에게 그만 끄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산해주고, 큰 아이 컴터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힐끔 핸폰 시계를 쳐다본 후 다시 문명화되어가는 원주민의 얘기로 빠져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엄마 유도복 어딨어?"

둘째 아이가 엄마의 달콤한 휴식을 깬다.

얼른 알려주고 다시 책으로 빠져들어가려는 순간 유도복을 입는 녀석의 엄숙한 몸짓에 눈이 붙잡혔다.

막내는 언니 옆에서  띠 매는 모습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복장을 갖춘 언니는 동생과 장난을 친다. 갓 이틀 배운 유도 기술을 마구잡이로 구사하며 그럴듯한 폼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깜짝할 새'에 그러니까 정말 눈깜짝할 새에, 언니의 다리걸기(다리걸기는 씨름기술인 것 같은데...)에 걸려 동생이 그대로 뒷통수를 바닥에 '쿵' 부딪히며 나자빠졌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큰 일이 난 건 아닐까, 주저없이 막내를 안고 머리를 살폈다.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막내는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치며 울고, 혹시나 싶은 엄마의 몇가지 질문(재령이 몇살? 언니 이름은 뭐야?)들에 울먹거리며 겨우 대답하고 있었다.

졸지에 큰 죄인이 된 언니는  자신의 행동이 고의가 아니었음을 피력하며 그렇게 자기 힘이 센 줄 몰랐다 며 어쩔 줄 몰라했다. 

둘째의 마음을 읽어주고 싶었으나 막내 아이가 워낙 크게 우는 바람에 그럴 여력이 없었다.

 

얼추 상황이 마무리되어가는 순간, 둘째가 말없이 도복을 벗는다.

이제사 둘째가 눈에 들어온 나는 살짝 미안해져 "왜 벗으려고?"라며 아이의 기분을 살폈다.

"응!" 대답하며 도복 대신 외투를 입는다. 그리고 평소 신주단지 모시듯 하던 돈상자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 안에 있던 천원짜리 지폐 한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내들었다.

"왜? 뭐하려고?"

"응, 과자 사오려고!"

"어딜 가려고? 가게 가려면 학교까지 가야 하잖아(걸어서 최소 20분은 걸린다)"

"거기 말고, 호수정에서 사면 되"

"아! 그런데 거긴 큰 과자 밖에 안 팔잖아?"

그 난리통에도 말없이 컴터 게임만 하던 큰 애가  "거기 과자 한봉지 삼천원이야!" 한마디 던진다.

오빠의 말을 접수한 둘째는 다시 돈상자를 열더니 부족한 만큼 오백원 짜리 동전을 더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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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아빠의 속옷 상자를 자신의 돈저금통으로 만들어 동전을 틈틈이 모아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마을과 떨어져 있는 곳이라 가게 하나 없다. 그런데 조금만 올라가면 동물원이나 서울랜드에 온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있는데 거기에 큰 봉지의 과자가 진열되어있는 것을 오가며 본 모양이다.

한편 둘째의 돈상자로 말할 것 같으면, 닌자고를 사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었던 거다. 어젯밤에도 일요일에 교회가서 헌금하면 오백원이 없어진다며 안타까워했었다.

 

며칠동안 자극적인 맛에 목말랐던 우리는,  둘째가  사 온  라면스프맛 과자 '대단한 나*칲'을 사오자마자 하이에나 떼처럼 단숨에 한 봉지를 먹어치웠다.

둘째는 역시 화끈한 여자다. 애지중지 모으던 돈을 동생을 위해 한꺼번에 헌납한 것이다. 그렇게 미안한 언니의 마음을 전한 둘째는 뒷끝없이 그 사건을 마무리하고, 다시 미워할 수 없는 여덟살 꼬마로 돌아갔다.

지금 그녀의 돈상자엔 백원짜리 동전 몇 개가 새로운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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