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를 한다. 중년의 두 아들은 예초기로 풀을 치고 늙은 아비는 갈퀴로 풀을 내린다. 원주변씨 삼의공파 26대손은 예초기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것만도 버거운데 일흔 일곱 25대손은 이 산 저 골짜기 흩어져 있는 산소들 가는 길이며 누구의 묘인지를 자식에게 알려주느라 마음이 바쁘다.
- 내 가고 나면 니들이 더 하겠나마는 내 있는 동안에는 해야지.
정승도 아니고 판서도 아니고 종육품 찰방이 입향조인 초라한 양반가. 명색이 종가였으되 25대손의 아비는 한국전쟁 때 끌려가 생사를 모르고 어미는 일찍 죽고 형제들도 어려서 죽어 25대손은 고아나 다름 없이 컸다. 가파른 현대사의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가까스로 버티느라 몸은 늙고 쇠했는데 늙을수록 뿌리에 대한 애착만 깊어지는 것이어서 해마다의 벌초가 근래 더욱 새삼스럽다.
- 다른 산소는 다 묵혀도 이 산소는 꼭 벌초하그래이.
아비의 어미가 묻힌 묘는 떼는 없고 잡초만 듬성듬성한데 할머니를 본 적 없는 그의 아들들은 그저 묵묵히 풀을 깎을 뿐. 아들도 산소는 망자가 아니라 남은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쯤은 아는 나이가 되어서 떼가 벗겨지고 봉분이 무너진 산소는 이제라도 묵혔으면 싶은데, 정작 마음이 쓰이는 곳은 봉분이 무너져 산소였던 흔적만 남은 자리. 그 자리에 뒹구는 쓸쓸함 따위가 마음에 걸려 아들은 또 생각한다.
- 내 가고 나면 형민이가 하겠나. 내 있는 동안에는 해야지.
그렇게 그렇게 쌓인 산소가 23기. 몰락한 종가로서는 너무 많은 벌초.
- 농부 통신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