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가족] 남편의 가사노동 파업선언

▷ ‘같은 듯 다른 듯 남과 여’라는 통계청의 서비스를 보면 30대 가사노동 시간이 남자는 51분, 여자는 4시간53분이라고 합니다. 가사노동 때문에 부부싸움이 괜히 나는 게 아니겠죠? 맞벌이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집안일은 여자 일’이란 고정관념이 강해 여자가 하는 집안일은 당연하고 남자가 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사노동 과잉에 시달리는 이 남편의 하소연을 보면, 예외적인 사례인지 세태의 변화상인지 갸웃합니다. 어쨌거나 양성 평등한 가정이 가장 좋은 거겠죠?

네 이상형은 집안일 잘하는 남자
내 꿈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부부
둘이 만나 하나가 된 뒤
가사노동은 오롯이 내 몫으로

먹다 남은 음식이 썩어도
옷이 바닥에 한가득 쌓여도
모른 척 내게 미루는 아내
나도 어릴 때 곱게 자랐거든?
평등한 가사분담을 요구한다

기혼남에게 처월드가, 기혼녀에게 시월드가 있다면 내겐 와잎(와이프)월드가 있다. 슈퍼 갑인 와잎과의 생활에서 가장 괴로운 건 가사노동 분담이다.

나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자랐다. 청소, 빨래, 음식, 설거지? 30년 같이 산 엄마가 해줬다. 집에 남자가 둘이나 있었지만 쓸데가 없었다. 불효자인 아들은 놀았고, 아버지는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비록 엄마를 돕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고된 일·가정 양립이 맘 편했던 건 아니다. 그래서 아버지 같은 남편은 되고 싶진 않았다. 물론 어머니도 누차 말씀하셨다. “결혼해서 빨래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면 쫓겨나니 제대로 하라”고. 그래서 결심했다. 내 여자에게만큼은 따도남(따뜻한 도시 남자)이 되리라!

결혼에 대한 내 다짐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부부’의 로망으로 쑥쑥 자랐다. “10년쯤 전에 <여성신문>의 올해의 평등부부상을 저희 부부가 받았습니다. 기사 제목이 ‘밥 빨래까지 하는 민주남편’이었습니다. ‘남자 망신 다 시킨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으나, 요즘은 시대가 많이 달라져서 남자가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것이 상을 받기도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결혼하는 신랑 신부도 언젠가는 올해의 평등부부상을 받을 수 있는 부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종강씨의 책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에 나온 이 구절이 결혼지침서가 됐다. 꿈을 이루는 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보통은 여자가 남자에게 집안일 안 한다고 혼내지 않던가? 나만 잘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랑 살기 전까지는.

결혼 뒤 집에 들어왔을 때 집이 깨끗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물론 6시에 칼퇴근해 7시 좀 넘으면 집에 오는 나와 달리 와잎의 퇴근시간은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200일 넘는 그 긴 날들 중 하루 정도는 좀 와잎이 치울 수 없을까. 안방, 거실, 옷방…. 와잎의 동선에 따라 옷이 한가득, 그릇이 한가득이다. 물을 마시면 물통은 부엌에 그대로, 밥을 먹으면 상에 그대로, 옷을 갈아입으면 옷이 바닥에 그대로. 며칠 전엔 집에 왔는데 보리차 끓여 먹고 남은 물이 주전자 속에서, 와잎이 먹다 남은 게장은 싱크대 안에서 썩고 있었다. 그냥 둘까 했지만 그냥 두면 일주일이 지나도 모를 것 같아 결국 내가 나섰다.

와잎의 이상형은 ‘집안 일 잘하는 남자’였다고 한다. 와잎의 자취 내공은 무려 8년. 보통 그쯤 혼자 살면 청소도 빨래도 음식도 척척이 아닐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와잎의 자취방은 언제나 설거지 한가득, 빨랫감 한가득 쌓인 폭탄 맞은 집이었다. ‘발 디딜 틈 없다’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가끔 ‘우렁신랑’ 노릇을 해줬는데 그때 너무 과도한 신뢰를 준 게 아니었을까. 이 사람에게라면 집안일을 믿고 맡겨도 된다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우리 집에서는 내가 하면 당연한 일, 와잎이 하면 부당한 일로 바뀌었다. 마치 당연한 일처럼 청소도, 빨래 널기도, 설거지도, 분리수거도, 쓰레기 버리는 일도 모두 요구했다. “그럼 넌 뭐하는데?” “난 밥을 해줄게.” 주말에 집에 있을 땐 밥도 몇번 해주긴 했다. 내가 제빵에 관심을 보이자, “요리도 잘하네”라며 은근슬쩍 밥 짓기를 넘기더니 이제는 대놓고 상을 차리라고 한다. 저항도 몇번 했다. 바뀐 건 말투뿐이다. “빨래해”가 “빨래 좀 해주세요~”, “설거지해”가 “설거지 좀 해주면 안 돼? 너무 피곤해. 우리 남편은 1등 신랑감이잖아”로 바뀌었다. 부탁이라는 미명 아래 일거리는 도리어 늘었다. “어차피 넌 시간 남으면 게임하잖아”라며 게임보다 가사노동이 훨씬 생산성 있는 일임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시간 와잎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밖에서 술을 마시는 등의 생산적인 일에 골몰했다.

결혼 뒤 설거지 몇번 했더니 손이 짓무르기 시작했다. 혹시 주부습진? 와잎의 성화에 피부과까지 다녀왔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와잎은 고무장갑을 사줬다. 계속 아프다고 하니 면장갑을 쓰라 했다. 그래도 안 나았다. 와잎은 결단을 내렸다. 식기세척기를 사기로. 결혼 전에 사람들이 “식기세척기는 꼭 사라”고 권유할 때 “네가 하면 되지”라고 말했던 와잎이었다. 생일선물로 컴퓨터 스피커도 안 사준 짠돌이 와잎은 설거지를 자신이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50만원 고가의 식기세척기를 바로 질렀다.(가사노동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가사도우미도 부를 기세다.) 그리고 내가 맡았던 설거지가 없어졌으니 다른 일을 더 하라고 말했다. 식기세척기 사도 냄비랑 프라이팬은 손 설거지해야 하거든? 계란찜 하거나 눌어붙은 밥풀은 식기세척기로 해결 안 되거든? 아니 무엇보다 식기세척기에 그릇은 누가 넣니?

몇번 손을 놓은 적도 있다. 그럴 땐 잔소리 작렬이다. “수건이 없잖아. 빨래를 꼭 하라고 해야 하냐.” “물컵이 없는데 설거지는 왜 안 했어.” “바닥에 먼지가 많은데 청소기 좀 돌려줘.” 자발적 가사노동을 요구한다. 게다가 미션은 항상 동시다발적이다. 설거지하고 있는데 청소기 돌리라고 하질 않나, 빨래 넣고 있는데 쓰레기 버리라고 하질 않나. 미션 임파서블이다. 내 몸이 열 개니? 설거지를 하다 보면 내가 왜 혼자 이러고 있나, 청소기 돌리면서 이 집은 나 혼자 사나 싶다. 바닥을 닦다 와잎이 벗어던진 양말을 발견하면 더 처량해진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판 거니, 네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니. 나쁜 와잎, 나쁜 와잎.

나도 너처럼 나가서 돈 버는데, 나도 너처럼 퇴근 뒤엔 피곤한데, 나도 너처럼 주말엔 좀 쉬고 싶은데…. 역지사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와잎에게 가사노동 파업이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와잎이 미운 것도, 애정이 식은 것도 아니다. 다만 평생을 같이 살 우리,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네가 좋아하는 남녀평등, 사회정의를 집안에서부터 함께 실현하자꾸나.

결혼 8개월차 새신랑

(한겨레신문 2013년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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