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 가족
한글 못 읽어 홍콩 못 간 건 아빠한테 비밀로 해줄게~
▶ 이모는 을지로의 인쇄골목까지 찾아가 정성스레 상장을 제작한 뒤 여섯살 조카를 불렀습니다. “상장! 예삐 어린이는 평소에 친구들을 잘 돕고, 그림을 열심히 그리기 때문에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 다만! 아직 한글을 못 읽기 때문에 홍콩행 비행기표를 수상하지는….” 홍콩디즈니랜드가 준다는 가짜 상장. 실망이 컸을 조카는 의외로 표정을 관리합니다. 이모의 즐겁고 엉뚱한 ‘음모’는 무엇이었을까요? 인터뷰;가족 투고 gajok@hani.co.kr

동생은 일하는 엄마다. 동생이 일하는 동안, 동생의 딸, 나의 여섯살짜리 조카는 우리 엄마와 동생의 시어머니가 번갈아가면서 돌봐주신다. 드물게 셋의 스케줄이 어긋나서 조카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날에는 나에게까지 연락이 온다. 저번 주에 그런 날이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나의 조카는 귀엽고, 또 귀엽지만, 오래 놀아주는 건 꽤 귀찮고, 약간 힘들다. 조카 혼자 좀 시간을 보내라는 속셈으로, 얼마 전에 같이 봤던 만화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를 그려보라고 했다. 조카는 ‘기쁨이’가 제일 좋다며 ‘기쁨이’만 그리겠다고 했지만, 한 명만 그리면 너무 금방 끝나기 때문에, ‘까칠이’랑 ‘슬픔이’, ‘소심이’랑 ‘버럭이’에 ‘빙봉이’까지 여섯 캐릭터를 전부 다 그려보라고 시켰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도록, 열심히 그려서 여섯 명을 다 완성하면, 디즈니 채널 그림 공모전에 보내서 상을 타게 해주겠노라고 거짓말도 보탰다. 그렇게 난 잠시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카가 실망하지 않게, 다음에 만날 때 가짜 상장이랑 디즈니 스티커나 한장 사다줘야겠다고 계획하면서, 이 정도면 나도 꽤 괜찮은 이모인 거 같다고 스스로 만족했더랬다.

문제는 다음날 걸려온 동생의 전화였다. 동생 말인즉, 조카가 이모가 그림을 디즈니 채널에 보내서 홍콩 디즈니랜드로 가는 티켓을 받게 됐다며 잔뜩 흥분해 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실제로 요즘 텔레비전 디즈니 채널에서 홍콩 디즈니랜드 무료 여행 이벤트 광고를 계속 내보내는 중이란다. 아마도 여섯살짜리 조카가 가난한 이모에게 비행기 티켓을 뜯어내려고 굉장한 음모 술수를 부리는 중이거나, 텔레비전 광고에 현혹되어 가고 싶어하는 바람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 같았다. 어찌 됐든 동생은, 조카가 몹시 흥분해 있으니, 정말 비행기 티켓을 사서 보내든가 애가 실망하지 않게 얘기를 좀 잘 해보라며 혀를 끌끌 차며 전화를 끊었다. 조카랑 다시 얘기를 해보기로 했다.

귀엽지만 조금 귀찮은 조카
‘인사이드 아웃’ 캐릭터 그리면
홍콩디즈니로 보내준다 했더니
진짜로 믿고 흥분해 버렸네

가짜 상장 만들어주자 탄성
한글 못 읽는다는 걸 핑계로
‘겨울왕국’ 스티커로 대신하자
짐짓 어른스럽게 반응하는데

 예삐야, 앉아봐. 지금 목욕하고 그럴 때가 아니야. 이모가 예삐한테 할 중요한 말이 있어. 문 닫고 와서 얼른 이리 앉아봐.

유치원에 갔다 온 조카를 엄마 손에서 낚아채어 조카 방으로 데리고 왔다. 우리는 작은 연두색 어린이 책상을 가운데 놓고, 더 작은 분홍색 어린이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의자가 너무 작아서 엉덩이가 몹시 아팠지만, 심각하게 앉아 있는 조카를 놀래줄 생각을 하니 그 정도 아픔은 기꺼이 견딜 만했다.

 예삐야, 저번에 이모랑 같이 <인사이드 아웃> 캐릭터 그렸던 거 생각나? 그거 이모가 디즈니 채널 그림 그리기 대회에 보내준댔잖아. 거기서 연락왔다.

조카 (긴장과 침묵) 응!

 예삐야,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상을 탈 수는 없는 거야. 상을 타는 어린이들도 있지만 못 타는 어린이들도 많다. 거기서 실망하면 안 되는 거지.

조카 (실망과 침묵) 알지. 실망하면 안 되지. 상은 다음에 타면 되니까.

 자, 짜잔~ 이거 봐라! 그런데 우리 예삐는 상 탔네! 디즈니랜드에서 상장 보내왔네! 짜잔!

인쇄 업체 봉투 안에서 가짜 상장을 꺼내 들자, 조카가 분홍색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쯤 떼어 몸을 들썩거리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이 땡볕에 컬러인쇄소까지 가서 가짜 상장을 인쇄해 온 보람이 있었다.

조카 (놀람과 침묵) 어머! 이모! 나 상 탄 거야? (흥분과 말더듬) 나, 나, 정말 상 탄 거야?!

 자, 예삐야, 똑바로 앉아봐. 이모가 상장을 읽어줄게. 잘 들어봐. ‘예삐 어린이는 평소에 친구들을 잘 돕고, 그림을 열심히 그리기 때문에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예삐 어린이는 앞으로도 항상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뿌듯한 웃음이 조카의 얼굴을 환하게 채웠다. 아, 즐거워. 예삐야, 미안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란다.

 ‘… (더 큰 소리로) 다만! 아직 한글을 못 읽기 때문에 홍콩행 비행기표를 수상하지 못했으나, 대신 위로의 작은 선물을 보냅니다. 다음에 한글을 읽게 되면 다시 응모해주세요. 2015년 7월 디즈니랜드.’ (웃음을 참으며) 어머, 예삐야, 상품으로 ‘겨울왕국’ 스티커가 왔네? 너 한글 못 읽어서 홍콩은 못 가나보다. 어쩌냐 실망스러워서. 완~전 실망했지?

조카 (의외로 망설임 없이) 아니, 하나도 실망스럽지 않아. 난 한글을 못 읽으니까 홍콩행 비행기표를 못 탄 거야. 하지만 일곱살 때 다시 응모하면 되지. 일곱살 때는 한글을 읽을 테니까.

조카의 실망 어린 반응을 잔뜩 기대했었는데, 반응이 너무 차분해서 재미가 없다. 유치하지만 더 괴롭히는 수밖에 없다. 술수를 써서 이모에게 비행기 티켓을 받아내려 한 조카는 이렇게 응징을 받는 것이다.

 예삐야, 너 일곱살에는 정말 한글 읽을 수 있는 거 확실해?

조카 응, 당연하지. 일곱살 되면 유치원에서 한글반 수업을 듣거든.

 야, 너 지금도 눈높이 선생님이랑 한글 수업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못 읽는 거잖아?

조카 (조그만 목소리로) 아니야, 눈높이 한글은 이상해. 낱말 카드가 하나야. 그래서 못 읽는 거야. (다시 큰 목소리로) 하지만 난 상 같은 거 필요 없어.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네 명이나 나보고 그림 잘 그린다고 그려달랬어. 그러면 되는 거야. 친구들이 잘 그린다고 했으니까 그걸로 됐어. 홍콩 디즈니랜드는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아. (옆에 있는 스티커를 뜯으며) 그리고 난 스티커에도 만족해. 난 스티커를 좋아하거든. 이모도 하나 줄게. 루루(내가 키우는 강아지)한테도 하나 갖다 줘.

난 여섯살짜리 조카의 반응에 몹시 감동을 받았다. 얘는 누구 조카길래 이렇게 어른스러운 것인가. 한글은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것인데, 눈높이 교육 같은 사교육을 벌써 시작했다며 동생을 나무랐던 내가, 한글을 아직도 못 읽는다며 조카를 놀렸다는 게 머쓱해졌다. 대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애들을 경쟁 구도로 몰아넣는다며 사회를 비판했던 내가, 가짜 상장으로 조카에게 사기를 쳤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예삐야, 예삐 말이 다 맞는 거 같아. 우리 예삐는 참 어른스럽구나. 홍콩 디즈니랜드가 별거인가? 한국에도 놀이동산 많잖아.

조카 어, 그런데 홍콩 디즈니랜드 가면 밤에 퍼레이드를 볼 수 있대. 공주님도 만날 수 있고. 거기 애들 타는 바이킹도 있다. 놀이기구도 많고. 그리고… 또… 산에 올라가서 개들한테 먹이도 줄 수 있대.

 산? 산에 개가 있대? 누가 그래?

조카 어, 개도 있지. 텔레비전에서 말해줬지.

 그리고 너 아직도 공주님 좋아하니? 시시하게?

조카 아니~, 나 공주님 싫어. 공주님은 한명인데,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시녀 해야 하니까 나쁘지. 그리고 왕자님이랑 결혼해야 하는데, 그러면 엄마 아빠랑 같이 못 사니까 별로지.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공주님이 없지.

 예삐야, 맞아! 공주가 있는 사회는 계급 사회니까 평등하지 않아서 안 좋은 거야. 우리 예삐는 왜 이렇게 똑똑해? 우리 예삐는 커서 뭐가 되려고 이렇게 훌륭한가?

조카 나? 나 펫살롱 주인 할 거야. 나 펫살롱 열면 이모가 키우는 개는 무료로 미용해줄게.

 잉? 애견 미용사 하고 싶어? 차라리 수의사는 어때? 애견 미용사 하는 거 힘들다 너….

조카 (코를 한껏 찡그리며) 싫어! 나 강아지 미용사 될 거야!

 야, 너 미용사 되면 큰 개가 와서 앙 물고 그런다.

조카 아이, 이모도 참. 그러면 입에 이렇게 마개를 씌우고 미용하면 되지.

 음… 그런가? (당황과 침묵) 하지만 그거 동물 학대지 않냐?

조카 응? 동물 흑돼지?

 뭐라고? 흑돼지? 지금 흑돼지가 왜 나와? 아… 웃겨. 너 학대를 흑돼지로 들은 거니?

조카 (당황과 침묵) …흑돼…지?

 야! 너 한글을 모르니까 학대라는 단어도 모르지. 괴롭히는 걸 학대라고 하는 거야, 학대. 동물 학대는 동물을 괴롭힌다는 뜻이야. 아이고 아가야, 너 지금 홍콩이 어디 있는지나 알고 간다는 거니?

조카 (당황과 침묵) 당연히 알지! 홍콩 디즈니랜드는 일본에 있지.

 ….

여섯살짜리 조카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엉뚱하다. 조카에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고 늘 생각하지만, 조카랑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욕심 많은 속물 어른처럼 말할 때가 있어서 반성하게 된다.

미안하다 예삐야. 이모는 네가 글을 못 읽어도, 상장을 못 타와도, 학대라는 단어를 몰라도, 홍콩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몰라도, 너를 사랑한단다. 건강하게 자라서 훌륭한 애견 미용사가 되렴. 수의사가 돈은 더 잘 버는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행복하게 살렴. 이모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홍콩 디즈니랜드에 꼭 보내줄게. 아, 그리고 엄마한테 한글 못 읽어서 홍콩 못 가게 된 건 아빠한테 꼭 비밀로 해달랬다는 안 쿨한 반전도 절대 모르는 척해줄게.

경리단길 뻥쟁이 이모


(*위 내용은 2015년 8월21일자 인터넷한겨레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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