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를 열자마자 시작되는 문장들에,

아! 이걸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어떤 대상이 너무 좋아도 어쩐지 불안해지는 건 왜일까.

너무 아름다운 여행기라서, 너무 아름다운 엄마와 아들이라서,

나는 또 설거지와 빨래를 쌓아두고,

책과 사랑에 빠지게 될까봐 두려움마저 드는 그런 책을 만났다.


밖에 나팔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났는데, 사람들이 TV를 보느라 이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내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 당연히 여느 엄마들이 언제쯤 한글나라를 시작할까 생각할 때 나는 언제쯤이면 아이가 제 발로 걸어 세상의 보물들을 찾아 떠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p.13

이 책은 만3살 아이와 엄마가 함께 떠난 터키 베낭여행에 대한 책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 비교적 용감한 편인 나도 3살..이라는 나이에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는데.

정작 아이는 자신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여 성장하지만, 여행이라는 특수상황 속으로 아이를 끌어들여 이것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엔 언제나 커다란 인내와 안쓰러움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런 순간, 아이는 선물처럼 그 모든 무거움을 한꺼번에 씻어준다.p.202

스스로 결정한 여행 중에 아이가 불편하고 힘든 상황에 놓일 때마다 밀려오는 '커다란 인내와 안쓰러움'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큰 마음의 짐이 되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아이와 함께 한 하나의 여행이 끝나자마자 또 다음 여행을 꿈꿀 수 있었던 건,

내가 저렇게 어린 것을 다그쳐가며 여행을 했나 싶은 생각에, 울컥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과 대견한 마음이 한데 뒤섞여 아이를 꼬옥 끌어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기특한 녀석,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믿을 수 없게도 내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p.344

일상이 아닌 여행이었기에 아이와 엄마가 더 깊이 경험하고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을 것 같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직 아무 것도 모를 것이라 쉽게 단정짓지만, 실은 아이들이야말로 어른보다 더 섬세하고 품위있게 인간의 감정과 세상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가진 게 아닐까. '낮은 자세로 공유하고 섬세하게 기록한다'는 오소희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아이 속에 깃든 인간다움을 아이 스스로가 발견하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는 걸 자주 느끼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여행기이면서도 아주 훌륭한 육아서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어린아이의 교육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미래에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갖기 힘든 것을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 정말로 늦어지거나 실기하면 그 사람의 영혼과 인격 밖으로 걸어 나가 되돌아오지 않은 것들, 필생의 숙제가 되는 것들... . p.340

똑같이 한국의 제도교육 속에서 자라나 기성세대가 되었을 텐데, 이 작가는 어쩜 이런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 두 돌이 되기 전부터 가베와 오르다 수업을 받고 문화센터를 다니며 백화점이 원하는대로 가장 훌륭한 소비자가 되는 엄마들이 지천에 널린 요즘같은 세상에.

나는 언제나 그곳에서 내가 제대로 아귀가 맞지않는 벽돌처럼 존재한다고 느꼈다. 불편했고 피로했고 따로 떨어져나와 혼자 거스르고 싶었다. p.265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같은 시대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아이를 재우고 모닥불가로 돌아와 나무토막 하나가 재가 되어가는 느리고, 고요하고, 충만한 과정을 지켜본다. 내 빈곤한 삶이 자리한 도시에서는 밤이 밤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p.264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그 각각의 시간이 주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새로이 깨달았다. 도시에서의 삶이 나를 지치게 했던 것은, 원하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숨어 있는 원하는 것을 골라내고 값을 지불하고, 나머지 것들은 버려야하는 나날의 피로함이었다. 삶을 아무리 간소화하려 해도 늘 몸과 마음이 번잡해지는 것은, 그렇게 경쟁적으로 틈입해 들어오는 원치않는 것들의 소란스런 유혹과 강요 때문이었던 것이다. p.244

여행을 통해 비로소 분명히 보이는 내 일상의 자리. 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글이다. 어린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 그 북새통(나는 이렇게 느끼지만, 작가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속에서도 삶에 대해 이런 통찰을 할 수 있다니. 놀랍고도 고마운 엄마..


좀 더 이 책 속에 푹 빠지고 싶지만,

벌써 어둠이 찾아오고 나는 또 밥을 하러가야 한다.

한 해가 마무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요즘, 오소희 씨의 책들은 우리 엄마들에게 '딱'이 아닐까 싶다. 혼자서도 용기를 내기 힘든 여행을 어린 아이와 함께 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너무나 고귀한 배움들을 아이와 어른이 함께 쌓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너무 감동적이야!라는 단순한 말들로 호들갑떨기 민망할 정도의 큰 울림이 전해져 온다. 이런 아름다운 육아 동료와 동시대를 함께 살며 그의 신간을 쏜꼽아 기다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이다.

책을 써 준 작가도, 이 책을 소개해준 살구님도, 함께 읽자고 손내밀어준 난 엄마다님께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언젠가 베이비트리에서 '작가와의 만남'같은 행사에 오소희 씨를 초대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행 비행기표를 예약할거란 상상을 혼자 했더랬다.ㅎㅎ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문장이 너무 많았지만, 나를 감동시킨 한 문장을 고르라면

그렇기에 아이는 내가 끌고 가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린 마음이 닿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이 아이의 인생은 오롯이 이 아이의 것이다.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것은 가방을 들어주는 정도의 일일 것이다. (212쪽)


괜찮은 육아책을 찾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꼭 읽어보세요.

글쓰기 공부에도 도움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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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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