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들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 태어나고 싶다면 그 이유는? 제일 많은 답이 오래된 역사와 아름다운 유산이고 그 다음이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라서란다. 세번째가 사계절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있어서라길래 요즘 날씨 봐서는 딱 동남아인데 아직도 그렇게 배우나 싶었다. 어렸을 때 하도 사계절이 있어 행복해요를 강요받으며 자란 탓에 고딩이 될 때까지 알래스카에도 사계절이 있단 생각을 못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사계절이 있어 축복받은 나라인 것처럼 교육받았는데 글쎄, 사계절이 왜 좋지?

고추가 다년생 작물이란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늘 따뜻하기만 하다면 5년이고 10년이고 느티나무처럼 커다랗게 자라 파랗고 빨간 수만개의 고추를 버찌처럼 조롱조롱 맺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가을 서리에 폭삭. 사계절이 있어 좋은 것은 '정자에 앉아 시 한 수 읊노라니 자연은 제 스스로 꽃 피었다 푸르고 단풍지더니 설경이구나. 오호 쾌재라!'가 가능했던 유한계급의 이야기.

겨울은 늘 혹독했고 보릿고개는 높았으므로 가난한 이웃들은 봄 여름 가을을 겨울 동안의 양식 마련을 위해 바쳐야 했다. 죽자고 일해도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으니 근면은 생존의 기본. 고추 같은 다년생 작물도 해마다 새롭게 심고 거두어야 하니 근면이 장려되는 건 당연지사인데 따지고 보면 모두 사계절 탓.

지금도 생각난다. '시에스타는 천하에 빌어먹을 민족들이 즐기는 게으름'이라던 중딩 때 세계사 선생. 그러면서 이어지던 우리 민족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그 덕에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부지런해야한다던 勸근면歌. 그런데 땡볕에 앉아 참깨를 솎다보니 드는 생각. '아니 시에스타가 어때서. 먹고 살 만하면 낮잠 좀 잘 수도 있지. 이 땡볕에 부지런은 미친 짓이야!'

그래서 잤다. 달고 맛있는 잠 끝에 팔라우가 떠올랐다. 연평균기온 27도, 인구 20,100명의 남태평양 작은 섬 공화국. 다들 부지런하지 않게 산다는데 그래도 다들 행복하다지. 겨울 양식 걱정만 안해도 그게 어디람. 연중 반팔 셔츠 몇 벌이면 될테니 명품백도 소용없을테고, 명품백이 소용없는데 더 멋진 차, 더 넓은 집에 집착할 리가. 그러니 게을러도 좋은 나라. 사계절이 없는 팔라우.

하기야 아침에 맑다 점심에 스콜, 오후에 폭염인 요즘 날씨 봐서는 우리나라도 곧 팔라우가 되지 싶다. 그러면 다들 조금은 게을러져서 겨울 양식 걱정을 덜고 좀 더 행복해질까. 겨울 없어지면 스키장 슬로프에 고추부터 심을 민족이라 기대는 없지만. 나만이라도 勸농땡, 禁근면.

- 농부 통신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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