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보세요. 잠깐만...(다다다닥) ...헥헥...사과...헥헥...땄냐? 하악하악...(이번 역은...)
배경음만으로도 퇴근길 지하철을 볼트처럼 달려서 문닫히기 전에 막 탄줄 알겠으되 그 전화를 나는 잠결에 받았다는 게 문제. 전화를 받으며 시계를 보니 8시 50분. 어이 서울 사는 친구. 10월의 폭설 소식이라면 몰라도 때 되면 보내줄 사과 안부를 묻기에 8시 50분은 너무 오밤중이잖아!
해만 지면 공습경보 내린 바그다드가 되는 시골인지라 저녁 먹고 누우면 8시 반. 몸이 고된 가을이어서 머리가 닿자마자 기절인데 잠이 깨어 생각해 보니 서울은 아직 초저녁. 나는 꿈나라인데 친구는 겨우 퇴근이구나.
서울의 야경에 감탄하는 외국인에게 '저 불빛은 야경이 아니라 야근'이랬다지. '저녁이 있는 삶'이 '못살겠다 갈아보자' 만큼 강력한 선거구호가 되는 나라에서 저녁을 아이와 함께 먹는 호사를 매일 누리는 직업을 갖고서야 알겠다. 이게 정상이지.
다락같은 전세금에 쫓겨 외곽으로 내몰렸다 하면 퇴근길 한시간 반. 칼퇴근해도 저녁이 있을까말까 한데 상사는 늘 퇴근 직전에 보고서 올리래지. 사흘돌이 회식은 매번 삼겹살인데 야이 부장님아 나는 채식주의자라고. 제발 집에 좀 가자!
엉덩이를 디밀었으나 결국은 튕겨져 지하철을 못타고 못탄 김에 에라 모르겠다 설렁설렁 살아도 뭐 어떠려구 귀농해 돌아보니 서울은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간다. 서울은 친구에게 맡겨놓고 나는 이곳 가을 깊은 골짜기에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지 확인하면서 살아야지 싶은데 어이쿠, 농사를 너무 설렁설렁 지었구나. 저게 그래도 명색이 콩밭이며 팥밭인데.
- 농부 통신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