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리가 내린 아침. 장독대가 하얗다. 마른 깻단을 옮겨다 불을 놓고 시린 손을 녹여가며 마지막 고추를 따는 시월의 골짜기는 겨울 문턱의 만추.
서리가 내렸으니 호박잎은 풀썩 주저앉겠지. 머위잎도 마찬가지. 열매만 단단할 뿐 속은 물러터진 호두나무도 이제는 잎을 내려놓을 때. 가을은 깊고 깊어서 골짜기의 모든 생명들이 잎을 떨구고 가지를 끌어안으며 몸을 추스리는데 한심하여라. 조며 콩은 손도 못댄 채 수수를 겨우 거두었다고 좋아라 하는 이 얼치기를 농부랍시고.
그래도 종일 고추를 따다 돌아가는 저녁은 고단하여라. 허리는 뻐득뻐득하고 팔다리는 뻐근뻐근한데 거참 별일이지. 저녁 추위에 떨고 있던 대추나무가 괜찮냐고 묻는다. 무서리쯤 별 것 아니니 조바심내지 말라는 저 서리태콩을 보라지.
꽃이 피거나 잎이 지거나 모른 척 밥벌이에 몰두했지만 정작 그 밥이 퍽퍽해서 자주 목이 메던 저녁이 있었다. 돌아가면 텅 빈 방, 밥벌이의 고단함은 너나 모두 마찬가지여서 각자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을 먹던 저녁이 있었다. 포장마차의 불빛조차 황홀했으나 골목길을 돌면 내 그림자만 길게 늘어지던 퇴근길은 늘 낯설었는데. 서울의 저녁은 그저 외롭고 쓸쓸하고 스산했었지.
종일 고추를 따다 돌아가는 저녁. 산그림자는 벌써 오스스하고 멀리 서쪽 하늘은 노을로 사위는데, 이상하여라, 울컥 눈시울이 뜨겁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 손을 씻고 밥 한끼를 먹는 이 단순하고 오래된 저녁이 주는 위안이라니. 아무렴, 사는 건 별게 아니지. 밭일을 마치고 흐린 국 한 그릇을 가족과 나누는 일이지. 그리하여 저무는 모든 풍경들이 내 초라한 노동을 위무하는 저녁. 고마워라. 농부 아니면 죽도록 알지 못했을 저무는 늦가을의 뜨거운 위로.
-농부 통신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