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서희, 엄마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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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딸이 여섯살이 되었을 때 물었다. 엄마의 직업은 무어냐고. 마침 어릴 적 첩보영화를 보며 키웠던 오랜 꿈을 떠올렸다. 나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엄마는 스파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파견되었고 이는 국가 기밀사항이므로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와 나는 그 뒤로 종종 스파이 놀이를 했다. 그녀에게 한국 정부를 대신해서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엄마의 필적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대신 편지를 써달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글을 가르쳤다. 아쉽게도 나는, 실제 스파이 업무는 하지 않는 주부다.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음식 솜씨나 집안 정리 능력은 한심할 정도여서 전업주부임을 밝혀야 할 때면 부끄러울 때도 있다.


작년부터 인터넷에 올린 글이 적잖은 호응을 받게 되면서 책을 내자는 제안을 몇몇 출판사에서 받았다. 그중 한 곳에서 이력서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프랑스 유학 시절 영화제 관련 일을 간간이 한 것 외에는 적을 일이 없었다. 난처한 상황을 유쾌하게 풀고 싶어 가출소녀의 입장으로 딴에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적어 보냈는데 답변은 건조했다. 내용은 재밌으나 필요한 것은 일반적인 이력서라는 것이었다. 커리어 상담을 직업으로 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그럴듯한 이력서 한 장을 뚝딱 만들어 줬다. 든든한 갑옷을 선물받은 듯 마음이 놓였으나 깔끔히 정리된 경력 속의 인물은 내가 아니었다.


모두가 전문가가 되라고 조언을 한다. 자격증을 따고 학력과 경력을 쌓아 화려한 이력서의 소유자가 될수록 자신의 가치도 올라가는 것 같다. 주부라면 훌륭한 요리 솜씨나 빼어난 인테리어 감각쯤은 선보일 줄 알아야 한다. 나의 가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사회가 판단한다. 세상의 요구에 부응해 끊임없이 발전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기분이다.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멋진 직업을 가진 유명한 사람이면 좋겠어? 아이가 대답한다. 엄마는 이미 멋진 사람인걸. 왜냐면 엄마는 재밌잖아. 아이의 대답을 듣고 힘이 났다.


나의 결혼은 대학 졸업 후 무작정 감행했던 프랑스 유학 생활만큼 무모했다. 영화제에서 만난 남자와 3개월 장거리 연애 끝에 몸만 달랑 미국으로 건너왔다. 결혼식은 생략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으면 평생 한이 된다는 주변의 걱정에, 흰 드레스는 좋아하지 않아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남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더라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내 행복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라는 신념과, 나의 가치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변하지 않는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이력서 한 장 쓰는 데에 흔들릴 만큼 나약한 것이어서 그때그때 충전이 필요하다. 결국 나는 허황된 이력서를 받아준 다른 출판사와 첫 책을 출간했다. 아이에게 엄마의 직업이 하나 더 늘었다고 말했다. 글도 쓴다고. 너에 대한 이야기도 참 많으니 네가 한글을 잘 익혀 읽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엄마는 엄마만의 길을 찾아 더욱 재미난 삶을 살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아이가 대답한다. 엄마만의 길이란 게 뭐야? 글쎄. 나도 재밌고 너도 재밌고 우리도 재미난 길? 걷다 보면 알 테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11년차 엄마 

 

(*한겨레 신문 5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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