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나는 두 번째 인생을 살 각오로 왔다. 공부가 재미있긴 했지만 여러 일을 계기로 박사 학위 공부에 대한 열망이 크게 꺾였고, 그래서 미국 대학원 진학에 실패했을 때에도 미련 없이 물러났다. 원서를 넣은 마지막 학교에서 불합격 통보가 왔을 때, 나는 그 편지를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생각했다. , 이제 나는 다시 학생으로 살 일이 없겠구나, 하고. 당시 남자친구가 극적으로(!) 합격 통보를 받게 되면서 그를 따라 미국에 오긴 했지만, 나는 전업주부, 전업육아 말고 무슨 일이든 일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학교 교직원에서부터 건물 청소인부, 은행 창구 직원에서부터 커피숍 점원까지 가리지 않고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연락이 오는 곳이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답은 바로 내가 가진 학위나 경력이 이곳에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영어와 관련이 있다는 데 있었다. 한국에서 영어통번역 학사, 영문학 석사를 하고 영어학원 강사였던 사람, 다른 기술은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몇 년간 내리 학생이기만 했던 사람에게 뭘 믿고 일자리를 준단 말인가. 직업인으로서 노동현장에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영어구사력도 문제였다. 딱 한 번, 도서관 사서 알바 자리 때문에 본 면접을 완전히 말아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이를 갖게 됐고, 그 뒤로 지금까지는 그저 육아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깊이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육아를 하면서도 내내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가 이보다 조금 더 크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3년 뒤, 5년 뒤 우리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살게 될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남편이야 학위 공부를 하고 있으니 우선 그걸 마치고 나야 그 다음 길이 보일테고, 나는..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내 이력서로는 어디 내밀어볼 만한 데가 없었다. 학력만 높으면 뭣하나. 어디 써먹을 기술도 자격증도 하나 없는데. 결국 다시 공부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하려면 1) 똑똑하거나 2) 운이 좋거나 3) 돈이 많거나 이 셋 중 두 가지 조건쯤은 만족해야 하는데 나는 저 셋 중 하나도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남편은 자기가 박사 학위 따고 여기서 자리를 잡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게 지원해주겠다고 말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거고 설사 그런 여건이 된다 하더라도 남편에게 기대어(?) 내 일을 도모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던 중, 버스 차벽에 붙은 광고에서 동네의 한 성인교육기관에서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읽었다. 고등학교 중퇴자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는 의미에서 생겨난 교육기관인데, 국적, 연령, 기타 조건에 상관없이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무료 교육 기회를 준다고 했다. 직접 방문해 알아보니 내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정해진 수업을 이수하고 우리네 검정고시와 같은 학력인증 시험을 치르면 고등학교 졸업장과 동등한 자격증서를 준다. 직업훈련도 포함되어 있어서 약국에서 일하는 기술직, 병원의 간호조무사, 중장비 기사 자격증 시험도 치를 수 있다. 공부에 흥미가 있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근처 전문대와 연계해 전문대 공부도 무료로 시켜준다. 게다가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아이를 데리고 오면 무료로 돌봐주기까지 한다!!

 

인생이 내 맘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지만, 또 인생은 타이밍이기도 하고, 자꾸 계획하고 꿈꾸고 애쓰다보면 이리저리 잘 들어맞는 때도 있다는 걸 알기에 이 기회를 한 번 잡아보기로 했다. 모든 게 무료이기 때문에 지금 내 상황에 정말 딱 맞는 프로그램이고, 일이 잘 풀려 우리가 정말 여기서 터를 잡고 살게 된다면 몇 년 후 내가 직장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침 아이에게도 새로운 환경,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니 아이에게도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아이와 잠시 떨어져 나만의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좋고, 그러면서도 아이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 심리적 부담감이 거의 없는 점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곳에서 함께 공부하게 될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난해서, 장애와 질병 때문에, 한 때의 실수로,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젊은 미국 청년들이라는 점에서, 내게 중요한 화두를 던져줄 수 있는 경험이 될 것 같다. 다양한 이유로 여러 경계에 걸쳐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미국 사회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 이 일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전업 육아를 하던 엄마에서 고등학생엄마로

몸도 머리도 비록 예전 진짜 고등학생 때보다 늙어버렸지만, 그 땐 몰랐던 삶의 다양한 층위들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됐으니 배움도 좀 더 깊이 있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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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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