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앞에 사랑은...jpg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소공녀'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도시의 극빈층으로 지내고 있는 주인공(이솜)은 추운 겨울날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남자친구(안재홍)와 딱밤 맞기 게임을 하고 있다.
있는 힘껏 때리고 펄쩍 뛰며 아파하는 것으로 추위를 어떻게든 잊어버리고 싶어 택한 놀

이였을것이다. 게임을 한참 하다가 남자 친구가 말한다.
"우리 그거 한지 너무 오래 되지 않았나?"
".. 맞다. 한 번 할까?"
"그래!"
두 주인공은 허겁지겁 옷을 벗기 시작한다.
두꺼운 겉옷을 벗고 머플러를 풀고 스웨터를 벗고 티셔츠를 벗고 내복을 벗고 속옷위에 드러난
맨살로 서로를 안으려는 순간 여자 주인공이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아, 추워!!"
".... 춥다... 진짜 춥다"
"안되겠다. 빨리 옷 입자"
두 주인공은 벗었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옷들을 다시 껴 입는다.
대충 주워 입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봄에 하자"
너무나 사랑하는 두 젊음이 살을 섞을 수 도 없을 만큼 추운 방이 표현하는 선명한 가난은 두 주인공이
처해 있는 어렵고 빈곤한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사랑 하나면 다른건 상관 없다는 말은 유행가  가사에서나 가능할꺼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살을 섞기 위해서는 최소한 옷을 벗고 껴안을 만큼 온기가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학창시절 배웠던 고전중에서 '고려가사' 중에서 였는지, '쌍화점'중에서 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랑하는 님과 함께면 엄동설한 얼음밭에 편 대나무 자리 위에서도 춥지 않을거라는 대충 이런
뜻의 내용이 생각난다.
흥, 말도 안되는 소리.
엄동설한에 얼음밭 위에 편 대나무자리를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그 위에 사랑하는 사람과 눕는다고?
맨 살을 대고???
그 님이 조인성이나 공유나 정해인 (음... 정해인이면 조금... 참아 볼까?   ㅋㅋ) 이라 해도 어림없다.
그 님이 나를 한겨울, 얼음위에 편 대나무 자리 위에 눕히려고 한다면 있는 힘을 다해 뻥 걷어차 버리고
군불 때는 온돌방 찾아 미친듯이 달려갈테다. 사랑따위 얼어죽는것에 비하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고 중년의 나는 생각한다.

최악의 폭염이 계속되는 있는 올 여름, 에어컨이 있을리 없는 우리집은 온 집안의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실내온도가 32도를 넘나든다. 미지근한 바람만 뿜어대는 선풍기 세대를 다섯식구가 아웅다웅하며
차지하고 있지만 살림하는 나는 그 선풍기 앞에나마 진득하게 앉아 있을 새가 없다.

남편이 하루 휴가를 내는 바람에 주말에 이어 월요일까지 끼니때마다 다섯 식구 먹을 더운 밥을 차려내고

치우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이런 저런 집안일을 하느라 종일 땀을 쏟았다.
좁은 부엌에서 옥수수 한 냄비 삶으면 땀이 줄줄 흘러 내리고, 하루 자고 나면 눅눅해지는 이부자리
걷어 2층 옥상에 널고 오면 또 땀이 줄줄 흐른다.
남편은 마당에 그늘막을 치고, 가장자리의 풀을 베고, 한 양푼 되는 감자도 깎아 주고, 설거지도 하면서

움직이고, 아들도 쓰레기 수거장을 몇 번이나 오가며 집안일을 돕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이 제일 많다.

11시 넘어 하루 종일 흘린 땀을 비로소 씻어 내고 이미 잠들어 있는 남편 옆에 누웠다.
트렁크만 입고 자고 있는 남편의 넓은 등짝을 바라보다가 모처럼 잠시 서늘해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남편의 늘어진 뱃살만 조금 주물르고 있어도 이내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내 다리를 남편의 허벅지 위로 올린다. 몸이 조금씩 찌릿해지는 것도 같은데....
안돼, 안돼, 안돼!!!! 3초도 안되서 몸을 떼고 말았다.
너무 뜨겁다. 더운 내 몸이 더운 남편의 몸과 닿으니 너무 너무 덥다. 아니 뜨겁다.
서로의 온도에 둘 다 데일 것 같다. 군침이고 뭐고 쏙 들어간다.

내 옆에 누워 있는 것은 남편이 아니다. 뜨거운 열 덩어리다. 잠결에 내 쪽으로 조금만 몸을 돌려도
열기가 훅 끼치는 열 덩어리다.
사람이 36.5도의 열을 내는 존재라는 것을 이 때만큼 생생하게 실감할 때가 없다. 남편도 아이들도
다 열 내는 뜨거운 것들이다. '엄마'하고 달려오는 열 덩어리들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다 어질어질
해진다. 엄마 좀 만지지 마, 엄마한테 기대지 마, 엄마 곁으로 오지마를 달고 산다.

나는 남편을 피해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인다. 남편보다 서늘한 벽이 더 좋다.
그리고 어떻게 자세를 취해야 최대한 덜 더울지를 진지하게 따져본다. 평소에는 반듯하게 누워서
자는 걸 좋아하지만 그렇게 누우면 몸이 침대에 닿는 면적이 너무 넓다. 등부터 엉덩이며 다리까지
너무 덥다. 모로 누워 자면 침대에 닿는 면적은 줄어드는데 내 팔이 내 몸을 누른다. 팔 한 쪽도
이렇게 뜨거울 수가..
게다가 모로 세운 몸이 어쩔 수 없이 눌러야 하는 다른 쪽 팔도 뜨겁다. 내 몸이 나에게도 덥다.
이건 정말 곤란하다. 내 몸의 일부가 내 몸에게 최대한 덜 닿는 자세를 고민하며 뒤척거린다.  징그럽게
고단하지만 쉽게 잠이 올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남편과 살을 섞는다는 것은 되지도 않는 소리다.
만약 욕구가 너무 너무 강해서 한 번 하려고 하면 밤이 될 수록 눈이 초롱해지는, 요듬 생체  에너지가
최대로 상승중인 열여섯 아들 몰래 안방 문을 잠가야 하고, 혹 새어 나갈 수도 있는 소리가 딸들 자는
거실에 들릴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창문도 닫아야 하는데 에어컨 없는 방에서 방문 닫고
창 까지 닫은 후에 더운 두 몸이 서로를 안아 더 한층 뜨거워질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절대 절대
피하고 싶은 일이다.

이리하여 나도 추위 때문에 살 섞는 것을 단념하고 마는 '소공녀'의 두 주인공들처럼 말끔하게
욕구를 거둔다. 사랑이고 뭐고 폭염속에서 생존하는 것이 우선이다. 건강 잃지 않고
이 더위를 견뎌내야 사랑도 가능해진다.

남편이여, 여름이 갈 때까지는 우리, 서로의 반경 1미터 안으로는 접근하지 말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이기보다 뜨끈뜨끈한 36.5도의 열 덩어리로 느껴지는
이 계절을 슬기롭게 잘 견뎌내고 영화속의 주인공 처럼 우리는 찬 바람 불면 하자.

더위 앞에서 사랑 따위 가뿐하게 넘겨진다.
오호 통재라. 무섭지 아니한가, 사랑하는 사람도 멀리하게 하는 이 더위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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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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