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첫 해에는 하루가 너무 길었다.
조용한 시골 동네에 살면서 세 살 된 아이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즐거운 시간도 있었지만, 무료하고 따분하기도 했다.
집안일이라는 게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들이 대부분이고,
아직 아이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만한 나이도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아내의 퇴근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저녁 시간은 왜 그리 느리게 가는지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돌파구로 찾은 게 라디오였다.
라디오(출처-enjoyaudio.com).jpg
(요즘엔 이런 멋진 라디오도 많지만, 난 그냥 태블릿에 라디오 듣는 앱을 설치해서 듣는다. 사진 출처: enjoyaudio.com)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다 지역 방송 라디오 프로에서 청취자 대상 퀴즈를 하는 걸 알았다.
나오는 문제가 그 주의 방송에서 소개된 내용이나 상식 수준의 것들이었고,
지역 방송이다 보니 듣고 참여하는 사람도 썩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문제 하나를 맞힐 때마다 상품이 한 가지씩 늘어나는 방식이었다.
간단히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소개하고, 퀴즈가 시작되었다.
긴장되고, 떨리는 가운데 세 문제를 맞혔다.
상품으로 청원 생명쌀 10kg, 외식 상품권, 손목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그 뒤로도 한 번 정도 다른 프로의 퀴즈에 참가해서
가족사진 촬영권을 선물로 받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휴직 첫 해, 라디오 덕분에 
반복되는 육아의 일상에서 벗어나 보기도 하고,
상품도 받는 일석이조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휴직을 한 작년과 올해에도 라디오는 아이 돌보며 집에 있는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아침에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 막내를 데리고 있으면서
빨래 널고, 설거지하고, 청소할 때,
경쾌한 노래 한 곡에 얼마나 기분이 흥겨워지는지
그 곡을 하루 종일 흥얼거리게 된다.

가끔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어 아내가 퇴근한 뒤 아이들을 맡기고 집을 나설 때,
파란 하늘에 양떼 구름이 펼쳐져 있거나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바라보며 듣는 
G 선상의 아리아, 판타지아, 그리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은 
또 얼마나 사람 마음을 들뜨게 하는지...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고, 새로운 활력이 내 안에서 솓구친다.

또 아침 시간대에 그림책을 읽어주는 프로도 자주 들었다.
지금은 진행자가 바뀌었지만 탤런트 강성연 씨가 읽어준
<마녀 위니>나 <생강빵 아이>, <모기는 왜 귓가에서 윙윙 거릴까?> 같은 그림책들은
정말 재미있게 들었다.
그림책 주인공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혼자서 연기하는 걸 들으며 감탄하던 기억이 새롭다.

고전을 읽어주던 한 프로에서는 한 달 간 <사기 열전>을 읽어주었다.
휴직하고 아이 돌보는 동안
'역사 교사'로 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게 해준 그 기획이 정말 고마웠다.

책을 읽어주는 라디오에서 들은
<레 미제라블>이나 <시간을 파는 상점> 같은 소설들도 참 재미있었다.
다음 이야기가 하도 궁금해서 '빨리 내일이 왔으면...' 하고 바라게 될 정도였다.

시를 읽어주는 프로도 내가 좋아하는 프로 중 하나였다.
시인이 직접 나와 자기 시를 낭송해주는 날도 있었다.
안도현, 윤제림, 나희덕 시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시인이 나오는 날엔 시인들에게 시인이 생각하는 '시는 (  )다.'의 대답을 들었는데,
그 대답이 아주 멋져서 적어두기도 했다.
그 중 윤제림 시인의 대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윤제림 시인은 '시는 받아 쓰기'라 했다.
입 없는 존재들,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받아 써서 들려주는 것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입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감동적이기도 하고,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민주화된 시대라지만 '입 없는 존재들'이 말할 수 있는 통로는 그리 넓혀진 것 같지 않다.
더구나 사람들의 일상이 너무 팍팍해져서 
그런 목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시인이 말한 '입 없는 존재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만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어떻게 해석되든 '시는 받아쓰기'라는 정의는
'입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내게는 아주 귀한 말이다.


이처럼 라디오는 아이 돌보며 집에서 지내는 내게 
휴식과 위로, 기쁨과 감동을 주는 좋은 친구다.
게다가 좋은 그림책도 소개해주고, 
가끔은 수업이나 교육에 대한 아이디어도 떠오르게 해주니 이보다 좋은 친구도 없다.
최근 몇 달 간 좀 뜸하게 듣던 라디오를 요즘 다시 듣는다.
오랜만에 좋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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