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대의 추억, 김장 담그는 날
» 권규리 단국대 시각디자인과 2년.
초등학교 시절, 겨울이 다가와서 김장을 하려면 그야말로 잔치분위기가 물씬 나는 집안의 커다란 행사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5남매를 합쳐서 9식구가 먹을 김치를 만들기 위하여 대충 200~300백 포기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란 우선 밭에서 배추와 무를 뽑아서 가져온 후, 배추는 절반으로 잘라서 하루 종일 소금에 절여놓는다. 그러면 그 양이 어마어마하여 마당의 수도가에 산처럼 쌓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친척과 이웃들이 서너 분이 오시고, 누나들도 합세하여 10여명이 안방과 건너 방, 그리고 마루에서 팀을 나누어 함께 김장을 한다. 그러면 그 많던 김치들이 어느덧 쑥쑥 줄어들고, 저녁이 되면 마무리를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올해는 이제 됐다”라는 말씀으로 갈음한다. 그 말의 뜻이란 김치만 있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김치가 있으면 기본 밑반찬이었으며 또한 전을 부치거나 찌개 등의 반찬도 쉽게 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군대에 입대를 하자마자 훈련소에서 김장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훈련병이라 그저 배추와 무를 나르는 담당이었다. 그런데 그 양이 참으로 엄청나서 트럭으로 계속 배추가 들어오고 몇 칠 동안을 나르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개 연대병력 수 천 명이 먹을 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2월 자대배치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막 김장을 시작했다. 비록, 그 양은 훈련소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지만, 150명이 먹을 배추 2.000통이 도착했다. 그러자 병정개미, 일개미가 일을 하듯이, 계급에 따라서 서로의 임무를 아무런 말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등병의 임무는 배추를 나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 소금에 절인 배추를 날랐다. 겨울이라 추위가 매섭지만 졸병 시절이라 춥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이듬해 김장을 할 때는 상병이 되었다. 이젠 칼로 무를 썰어서 깍두기를 만드는 임무가 담당이었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하루 종일 자르고 잘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100여명이 함께 하니 이틀 만에 마무리를 했다. 군대에서의 마지막 김장은 제대를 얼마 남지 않은 말년에 했다. 이제 최고의 고참이라 아무런 보직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후임들이 하는 김장을 순시하고 감독하며 맛을 보는 게 일이었다. 그래도 군 시절에 최고의 추억이라면 밤에 보초를 서고 돌아와서 몰래 끊여먹는 라면과 거기에 넣어먹는 김치가 최고였다.
이제 11월 하순이 되자, 우리 집에도 김장할 날이 다가왔다. 오전에 강의를 마치고 2시 경에 집에 왔는데 아내가 거실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서성거린다. 그리고 하늘이 꺼지는 듯 한숨을 내쉰다. 내일이 김장인데 너무 부담이 된다는 말투였으며, 심지어 김장을 하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정말 아내에게 김장을 담그는 일이 그토록 혹독한 시련의 과정인가보다. 아내가 이런 말을 할 때, 즉시 하는 행동은 빨리 그 마음을 수습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오늘 마트에 가면 내가 도와줄까?”라고 슬쩍 말을 던졌더니 유의미하게 허락을 한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마트에 가서 카트를 끌며 아내가 재료를 구입을 하면 즉시 카트에 넣었다. 하지만 배추는 구입하지 않았다. 이미 절임배추를 주문을 하여 그 날 저녁에 도착했기에 마트에서는 무와 김장에 들어갈 재료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것은 배달을 신청하였으므로 힘들여 들고 오는 일도 하지 않았다.
김장하는 당일, 사무실에 있다가 강의를 하러 가기 전, 3시 쯤에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아내가 받는다. 그래서 김장을 하느라 수고하는데 위문품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필요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서 딸을 바꿔달라고 해서 통화를 했더니 고급 아이스크림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전문점에 갔더니 수 십 가지의 아이스크림이 있다. 그래서 다시 딸과 통화를 해서 딸이 원하는 4가지를 골라서 담았다. 집에 도착하자 장모님과 처재, 아내, 그리고 딸이 열심히 김장을 하고 있다. 딸은 환한 미소로 아이스크림을 받았고, 서로의 취향에 맞추어 나누어 먹었다. 올해의 김장의 양은 포기수로 계산하기가 어려웠다. 절임배추 10키로 그램 6개를 구입했기 때문이다. 아마 40~50포기 정도라고 한다. 집에 들어오자 아내는 하던 일을 멈추고 수육과 노란 배추 잎과 양념을 준다. 힘내서 강의를 열심히 하란 의미보다 기분이 좀 넉넉해졌다는 신호다. 저녁에 김장을 마치고, 처재와 장모님은 각각 김장한 배추를 가지고 갔다.
강의가 끝나고 밀린 일이 있어서 밤 10시가 넘어서 사무실에 들렸다. 그러자 조금 후에 문자가 도착한다. ‘빵빵’이라고 아내가 빵을 사오라는 메시지다. 그래서 뜬금없이 ‘돈 없어’라고 보냈다. 그러자 아내는 다시 ‘흑흑’이란 문자가 온다. 빵을 살 수 없다는 남편의 농에 우는 시늉으로 화답을 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아내가 힘은 들었겠지만 마음의 고생을 덜하며 김장을 했음을 직감한다.
김장이란 무엇인가? 사회심리학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보자. 옛날에는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므로 지금보다 더욱 힘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많은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했다. 그러므로 그 많은 배추의 양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김장을 할 때 서로 수다를 떨면서 하기에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바로 이웃 커뮤니티로 인하여 김장은 힘도 들지만 보람이 있는 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김장을 하지 않고 사서 먹는 집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김장이란 고리타분하고 매우 힘이 든다는 사고방식으로 변했다. 그 이유는 우선 도와줄 이웃이 없기 때문이며 김장의 진정한 멋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수많은 양념들과 배추와 무을 구입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여자들에게 갑자기 많은 에너지와 머리를 써야하는 골치가 아픈 일거리가 된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의 김장은 장모님, 아내, 딸 이렇게 3대가 함께 했기에 수월한 편이다. 이미 아내는 딸에게 김장할 날을 사전에 예고하였고, 딸도 이에 호응을 했다.
가족문화가 급속도로 변하면서 편리한 점도 있지만 잃어버리는 것들도 많다. 김치를 단지 반찬으로 먹는 의미가 있지만 가족 간에, 이웃 간에, 세대 간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경과 생활습관이 바뀌면서 좋은 전통을 점점 잊어버리고 편리함 위주로 사는 듯 하다. 김장을 마치고 딸은 배탈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배추의 노란 속이 맛이 있어서 많이 먹었고, 더구나 아이스크림까지 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또한 장모님은 사소한 병으로 단기 입원을 했다.
그래도 무엇보다 아내가 딸에게 커다란 선물을 한 듯하다. 몸에 밴 친절은 숨길 수가 없듯이, 딸에게 있어서 3대가 함께 김장을 하면서 느껴지는 정서와 감성은 세월이 지나도 잊어지지 않은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세월이 지나 딸이 엄마가 되었을 때, 자식과 함께 김장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로서 자식에게 먹일 김장을 직접 해주었다는 자부심도 갖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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