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전 엄마가 갑자기 손자한테 주시는 거라며 작은 책상과 의자를 보내오셨다. 아이가 두돌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왜 보내셨는지는 의아스러웠지만, 일단 책상과 의자는 꽤 요긴했다.20121128_1.jpg » 한겨레 자료 사진

원래 아이는 책 읽는 걸 좋아했고 낙서하는 걸 즐겼다. 책상으로 바짝 당겨 의자에 앉혀놨더니, 혼자 소리내어 책 읽는 시늉을 한참 했다.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한쪽에 일,이,삼 하며 엉터리 숫자를 색연필로 그렸다. 다른쪽에 이상한 동그라미와 막대기를 그려놓고는 자동차, 멍멍이, 고기라고 주장(!)했다. 제법 공부하는 어린이의 태가 났다.

그렇게 아이는 한동안 책상을 썼다. 하지만 살다보니 책상 위에는 뭔가를 자꾸 올려두게 됐다. 아이는 보던 책과 그림 그린 종이를 그대로 놔뒀다. 아내는 기저귀 주머니 놓을 곳을 찾지 못해 책상에 올려놨다. 그 아래위로는 내가 보던 책이 끼어있기도했다. 결국 책상에는 딱히 앉아있을만한 공간이 없어졌다. 아이는 예전 책상이 없던 때처럼 다시 소파 위에 종이를 펼쳐놓고 기대서서 그림을 그렸다. 책은 바닥에 앉아서 또는 눕거나 엎드려서 읽었다.

어느날 엄마가 오셨다가 그 꼴을 보곤 화를 내셨다. 책상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치우시더니, “책 보고 그림 그릴 땐 여기 앉게 해야지!” 라며 나와 아내를 나무라셨다. 조금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네, 네” 하고 책상 위를 치웠다. 그 뒤론 아이의 학습공간을 온전하게 보장해줬다. 아이는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왜 그리 역정을 부리셨을까? 얼마 뒤 엄마는 아내를 따로 불러 이유를 얘기해주셨다. 나도 어릴 적부터 책도 낙서도 좋아했단다. 그런데 노상 엎드려 있었단다. 하긴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내 책상이 생긴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전엔 숙제를 하면서 밥상을 펴놓기도 했지만, 책은 대개 엎드려서 읽었다.

엄마는 내가 그러다 비염이 생긴 게 못내 안타깝고 미안했다고 하셨단다. 그제야 나도 기억이 났다. 어릴 적 만날 코가 꽉 막히는 비염으로 병원을 한참 다녔는데, 의사선생님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게 원인중 하나일 거라고 하셨다. 비염은 나중엔 좋아졌다. 의사선생님의 그 말씀, 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울 엄만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이를 키워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미뤄 짐작하게 된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보여도 부모는 얼마나 염려가 되던가. 하물며 그 원인이 부모 자신이란 생각이 들 때 그 죄책감은 얼마나 클까. ‘엄마가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를 아무리 많이 한들 그 부담을 얼마나 덜 수 있을까.

아! 그렇게 보니 부모의 일상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아이가 아토피 피부가 된 건, 임신을 전후로 먹었던 라면·햄버거 때문은 아닐까? 아이가 버릇없이 제멋대로 구는 건, 임신 중에 태교를 제대로 못해서가 아닐까? 아이의 머리통이 동글동글하지 못한 건, 잠잘 때 때맞춰 요리조리 굴려주지 않은 게으름 탓은 아닐까? 아이의 말문이 늦어지는 이유가 부부의 말다툼은 아닐까?

고민을 하면할수록 한 순간도 편하게 지낼 수가 없다. 나도 사람인데, 이렇게는 살 수 없다.

일단 엄마한테 말씀을 드려야겠다. “엄마, 나 이제 비염 괜찮아요.” 그리고 아이한테 얘기해야겠다. “최대한 미안할 일은 하지 않으마. 그래도 미안할 일이 생기면, 네 자식한텐 안 그러도록 하마. 그때 되면 너도 내 심정 알 게다.”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2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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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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