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5_2.JPG » 한겨레 자료. 아가야. 네가 이 글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몇년이나 지나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아빠도 오늘의 네 모습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나. 아마도 내일부터 우리 가족의 일상은 지금까지와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 마치 네가 태어났을 때처럼 말이야.
 
요즘 아빠가 너의 깨어있는 모습을 보는 건 1주일에 2번 정도야. 새벽녘 아직 자고 있는 네 이마에 입맞추고 출근해서는, 한밤중에 들어와 잠든 네 얼굴을 쓰다듬으며 바라보다 잠이 들거든. 맨날 그러긴 싫어서 아빠는 두어달 전부터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하고 최대한 일찍 퇴근을 해. 그리고 하루 쉬는 토요일엔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들이를 다닌단다. “우~(멀리) 갈까?”하며 신이 나서 웃는 네 얼굴은,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아빠는 네가 말을 배워가는 게 무척 재미있구나. 지금보다 좀더 어릴 적부터 너는 ‘엄마’, ‘아빠’ 하는 간단한 단어보다, 뭔가를 가리키며 “이게 뭐야?”라고 묻고 거기에 어른들이 대답해주는 걸 즐거워 했단다. 그렇게 이런저런 단어를 습득했던 걸까? 23개월이 된 넌 1부터 10까지도 잘 읽고, ㄱ,ㄴ,ㄷ,…도 읽어내고, A,B,C,…도 소화했어. 좋아하는 포도, 딸기, 사과, 빠요(바나나) 같은 과일 이름도 입에 붙은 걸 보면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심지어 엄마는 네가 영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어. 개월수에 견줘 빠르다고는 하는데, 많은 엄마들처럼 망상에 가까운 희망일 수도 있지. 널 닥달하며 공부시킬 생각은 없다만, 넌 요즘 아침마다 눈을 뜨자마자 “공부, 공부, 펜, 펜” 하며 지필묵을 찾아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알 수 없는 그림을 한참 그리곤 해. 어느날 집에 왔더니 유리창에 상징성 강한 알타미라 동굴벽화 같은 그림이 그려져있었어. 이틀 뒤 엄마가 그거 지우느라 엄청 힘들었지.
 
아가야, 넌 요즘 노래도 얼마나 잘 부르는지 몰라. 마치 머릿속에서 노랫소리가 계속 맴도는 양, “나비야 나비야”, “에이 비 시 디 이 에프 지”, “숫자놀이 할까 맞춰봐요” 등 네가 좋아하는 수많은 노래를 잇따라 흥얼거려. 노래책은 이제 헤어져서 더 볼 수가 없고 그 대안으로 택한 인터넷 동요사이트를 컴퓨터에 띄우면, 넌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짓는단다.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아빠와의 숨바꼭질은 네가 가장 즐거워하는 놀이 중 하나지. 엄마 화장대의 향수병을 가져다 바닥에 일렬로 줄을 세우는 것도 넌 참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 어딜 가더라도 손에 장난감 자동차 하나를 꼭 쥐고 다니고, “붕붕!”, “바퀴!” 하며 뿌듯해하는 표정도 얼마나 예쁜지. 요즘 식탁이나 의자 위에 자꾸 올라가는 통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불안감은 늘었다만, 양치질과 세수, 감기약 먹기 같은 싫어하는 일도 잘 참아내는 걸 보면 수고를 많이 덜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생겨.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데, 엄마 말로는 아빠가 이유식을 잘 해먹였기 때문이라니 아빠로선 어찌나 보람된 일인지 몰라.
 
이런 일상이 내일 낳을 동생이 집에 오면 조금은 바뀌겠지. 당장엔 조금 더 보살핌이 필요한 동생에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테고, 넌 어쩌면 사람들이 너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걸까 고민하며 속상해할지도 모르겠어. 글쎄,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아빠의 사랑을 동생과 나누느라 너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일은 없을거야. 엄마·아빠의 사랑은 무궁무진하니까.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2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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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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