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4_4.JPG » 한겨레 자료 사진.
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동네 학교의 운동장에 갔다. 방학한 학교의 잔설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작은 신발이 또렷이 찍혔다. 자박자박 소리와 함께 눈 위로 발자국이 생기자 아이의 눈은 동그래졌다.

아이는 그림자 놀이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운동장 모래밭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집의 마룻바닥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이는 두 발을 번갈아 들었다놨다 하면서, 그림자를 뚫어져라 여겨봤다. 이내 두 손을 하늘로 쳐들어 ‘반짝반짝’ 하더니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말 신이 난 게다.

 “술래잡기 할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 제안에, 아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잡아라!”하며 쫓아갈 듯 내가 시늉하자, 꺄르륵 넘어가며 반대 방향으로 냅다 달아났다. 넘어지면 바로 잡아줄 수 있을, 하지만 손을 뻗어도 바로 잡히지는 않는, 추격의 스릴을 느낄만한 거리에서 아이를 뒤쫓았다. “잡아라! 잡아라!” 아이는 좋아서 꺅꺅대며 운동장을 휘저었다. 뛰다가, 걷다가, 그림자 보며 춤추다가, 힘들어서 안겼다가, 벤치에 앉았다가.

쨍하고 깨질 것 같은 싸늘한 공기, ‘후’ 불면 입김이 절로 나오는 추운 날씨였다. 아이와 내가 빨개진 코를 연방 훌쩍거리며 한참을 놀았더니, 뭐하나 보러 온 아내가 저만치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 왔네!”

금세 달려갈 줄 알았던 아이는 갑자기 신발에 묻은 흙과 눈을 털자고 했다. 흐트러진 모자와 장갑의 매무새도 고쳐달라 했다.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여러 핑계를 댔지만, 분명히 더 있고 싶은 눈치였다. “오랜만에 나와서 아빠랑 놀았더니 기분 좋은 모양이네.” 아내의 한마디는 칭찬 반, 불평 반이었다.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아내는 뱃속 둘째가 7개월로 접어들면서 밖에 나가거나 아이와 놀아주는 걸 힘들어한다.

‘아빠의 육아’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게 ‘몸으로 놀아주기’다. 아빠가 ‘과격하게’ 놀아준 아이의 IQ가 높다는둥, 아빠와 몸을 쓰는 놀이가 신체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둥, 아빠가 활발하게 놀아준 아이가 사회성이 좋고 적극적이라는둥, 아빠의 몸은 아이의 가장 훌륭한 장난감이라는둥, 아빠랑 많이 노는 아이는 소아 비만이 적다는둥, 결국 아빠가 아이와 놀아주면서 육아에 동참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빠가 놀아주지 않는 아이는 소아 우울증 같은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협박’도 따라붙는다. 더욱이 엄마가 배가 부른 상황에선, 아빠가 몸으로 놀아줘야 할 필요성은 배가 된다.

난 못내 아쉽다. 새벽별 보고 출근하는 처지에선, 일찍 퇴근하지 않으면 아이의 깨어있는 얼굴을 보기 힘들다. 어쩌다 일찍 퇴근해 아이를 보면, 하도 오랜만이라 “그간 격조했노라” 인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아이는 빙긋 웃으며 일찍 돌아온 아빠를 환영하지만, 놀아준 지 1시간도 채 안 돼 나부터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아이도 뒤이어 잠이 든다. 아내 핸드폰 속에 나와 아이가 같이 찍힌 사진은 이런 모습이 대부분이다. ‘규칙적인 놀이’는 머나먼 꿈이다.

아이는 하루하루 커간다. 말도 곧잘 따라하고, 사리분별도 또렷해지는 게 보인다. 제법 의사소통이 되니 키우는 재미가 난다. 내가 놓치고 있는 하루, 한 순간이 그저 아쉽다. 좋은 아빠가 되는 길은 뭘까. 나중에 둘만의 여행으로 만회가 될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게 옳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그렇게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2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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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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