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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아홉시...
남편이 영어사전을 펴들고 공부를 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 내 남편이란 말인가!!! 결혼 10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이다.
아빠가 공부를 하고 있으니 아이들도 TV틀어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각자 제가 할 거리들을 가지고

아빠가 공부하는 탁자로 와서 앉는다. 필규는 일주일치 밀린 일기를 쓰고 윤정이는 그림을 그린다.
사진에 안 나왔지만 잠시후엔 막내 이룸이도 공책 하나 찾아들고 아빠 옆에 앉았다.
꿈에서나 그려보았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니 카메라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며칠전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언젠가 가족들과 해외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서라던가, 순수하게 자기 개발을 위해서라던가 하는

근사한 이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회사지시'에 의해서 시작한 공부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간에 아이들은 요즘 저녁상만 물리고 나면 영어 교재를 펴들고 공부하는

아빠로 인해 그 곁에서 함께 무언가를 하는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부모가 공부해야, 자식도 공부한다'는 진리를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기를 쓰고 돈을 벌어 학원비를 대고, 과외를 시키고, 연수를 보내며 뒷바라지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애를 써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한눈을 팔고 엉뚱한 짓을 하거나 책상에 앉아서도 영

집중을 못 하는게 현실이다. 뒷바라지 하는 부모들은 속이 터지고, 야속하고, 답답하다.
어떻게하면 아이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습관을 길러 줄 수 있을까.. 많은 부모들이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잘 하거나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하는 집은 공통점들이 있다.
그런 집들은 '공부 분위기'가 잡혀 있다는 것이다.
TV를 보는 시간과 각자 공부 하는 시간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고, 부모도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경솔하게 스마트폰을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문화가 있다.

아이들의 심리는 단순하다. 부모가 하는 것은 저도 하고 싶어진다.
엄마가 TV로 드라마를 보면 아이도 그 곁에 앉아 같이 보고 싶다. 아빠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이도 똑같이 하고 싶어진다. 엄마 아빠는 드러누워 TV를 보면서 '너는 들어가서 공부해!'라고 한다면
어떤 자식이 기꺼이 그러고 싶어질까.
부모는 자기가 즐기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식에겐 오로지 공부만을 강요한다면
그런 부모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결코 공부의 의미와 즐거움을 깨닫기 어려울 것이다.

자식 모두를 훌륭하게 키운 부모들이 쓴 책을 보면 어려서부터 책 읽는 즐거움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주말마다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고, 그 책을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집안 곳곳에 재미난 책을 두어 아이들이 언제나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신경썼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아이들에게만 공부하라고 하지 않고 부모도 각자 공부할 거리를 찾아 함께 공부하곤 했다는 이야기도 단골 소재다.

집안이 이런 분위기라면 자연스럽게 아이는 부모를 따라 함께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서 '공부'란 입시공부를 의미한다.
대학과 취업을 위한 '공부'를 향해 근 20여년을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우리에게 공부를 빨리 대학가고, 취업해서 던져 버리고 싶은 지긋지긋한 형벌과 다름없다.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나도 제일 먼저 '수학 정석'과 '성문 영어'책을 던져 버리는 것으로 그 홀가분함을 만끽하지 않았던가.

이러다보니 입시를 끝내고 어른이 되어 버리면 그것으로 공부는 끝났다고 여기기 쉽다.

평생 책을 벗삼아 지내며 하는 일과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관심분야를 찾아 스스로 즐겁게 배우고 익히는 문화가 자리잡을 틈이 없는 것이다.

 

사실 공부란 입시가 전부가 아니다. 시험과 성적과 합격을 위한 공부는 진정한 공부일 리 없다.
모르는 것을 향한 끝없는 탐구와 열정이야말로 하나의 존재가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평생 나아가야 할 모습이 아닐까.

일전에 큰 아이 학교에서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님을 모셔서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왜 아이들에게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합니까? 그런 부모들은 공부가 끝났나요? 자기들도 배워야 할 것들이 끝없이 많은데, 아이들에게만 공부해라 하면 안됩니다. 부모란 공부가 끝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모가 되면 진짜 공부를 해야지요. 학교 다닐때 해보지 못했던 진짜 공부말입니다.
부모들이 이런 진짜 공부를 시작하면 자식들은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제 공부를 합니다.
이게 진짜 교육입니다.'

 

내가 비로소 내 관심분야를 찾고 스스로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이후 였다.
전공이나 학과목 성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공부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스승을 찾은 것도 그 무렵부터였고 지역화폐니, 공동체 운동이니 하는 것들을 접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새로 알고 배우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억지로 해야 하는 과정에서 벗어나니 진정으로 내 마음이 흘러가는 주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공부들은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를 이끌고 있다.

 

부모가 공부해야 자식도 공부한다.
남편처럼 뒤늦게 영어공부를 해도 좋지만 어떤 주제든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게 배움을 할 수 있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란 공식을 외고 연도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좆아 기꺼이 몸과 마음을 바치는 모든 행위다. 부모가 이런 공부를 한다면 자식도 공부의 즐거움을 알 것이다.

 

'엄마, '인혁당'이 뭐예요?'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어깨너머로 필규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아이가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겪었지만 아직 정리되지 못한 역사에 대해서 아이가 묻기 시작한다. 어른으로서 엄마로서 나는 자식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내가 주는 실마리가 아이의 호기심과 배움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부터 자식은 부모에게 어려운 존재가 된다. 자식앞에서 엄마인 나도 역시 함께 배우고 더 찾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혁당이라...., 엄마랑 함께 자세히 알아보자.'

그렇게 시작되었다.
열살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 나는 공부했다. 처음으로 '인혁당 사건'이 내게 명확하게 들어왔던 계기였다.

 

'엄마, 일본은 왜 진주만을 공격했을까요? 일본은 작은 섬나라인데,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미국을

공격한거잖아요? 왜 그랬어요?'
필규가 아홉살때 던진 이 질문이 나를 세계 제 2차대전에 대해 공부하게 했다.

 

자식이 던진 질문앞에서 부모도 공부해야 한다. 부모는 결코 자식보다 더 많이 아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새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를 키워가며 깨닫고 있다.
그래서 영어공부하는 남편 옆에서 나는 요즘 현대사 공부를 하고 있다.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주기 위해 시작했지만 결국은 나를 더 크게 하는 공부다.

 

부모와 자식은 배움앞에 함께 가는 동무다.
공부는 부모가 자식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함께 읽고, 배우며 앞으로 갈 뿐이다.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이런 공부의 소중함과 재미를 느껴보지 못할 뻔 했다.
자식이 던지는 질문이 두렵기도 하지만 나를 더 배우게 하는 길임을 늘 새기고 있다.

 

그러니 10년 만에 영어책을 펼쳐든 남편이여, 힘 내시라..
억지로 하는 공부라도 자식들은 당신을 새롭게 보고 있다.
더듬거리며 사전을 찾고 녹슨 발음으로 영어를 말 해보는 당신...

 

자식들 앞에서 공부하는 남편이야말로 진정 섹시하구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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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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