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행복할 거라면

책읽는부모 조회수 6166 추천수 0 2012.04.16 21:07:24

  결혼하기 전의 어느 설날에 사촌 언니와 당질이 세배를 왔다. 당질은 수학 교사로 정년퇴직하신 아빠로부터 과외를 받았는데, 수능에서 수학은 만점을 받았으나 다른 과목을 잘 못 봐서 아빠가 매우 가슴 아파하셨다. 그런데 수능 비중이 높은 고대 법대는 탈락하고, 내신 비중이 높은 서울 법대는 합격했다고 한다. 아빠는 매우 기뻐하셨지만, 나는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신혼 초, 남편에게 아들을 원하는지 딸을 원하는지 물었더니, ‘그저 건강하고 반듯하기만’ 바란다는 교과서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보라고 살랑살랑 꼬드겼더니 ‘아들일 걸요.’란다. ‘걸요’라니. 결국 아들을 원하는 것이냐고 채근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이야기는 무려 병자호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요약하자면 조상이 묘를 잘못 써서 대대로 아들만 낳는 집안이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4형제, 시아버님도 4형제, 시할아버님도 4형제, 시조카들도 모두 사내아이... 나도 열외 없이 아들을 낳았다.

  산부인과에서 산후조리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집으로 왔다. 하얀 벽지가 밋밋하니 시각 자극이 부족한 것 같아서 벽에 뭔가를 붙이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선물 중에는 ‘한글놀이’, ‘숫자놀이’ 같은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종이들이 있었다. 그걸 좌르륵 붙였다. 친정에서 동생이 와서 보고는 ‘아이의 행복이 중요하지, 무슨 조기교육이냐’며 난리다. 아닌데, 나도 행복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그냥 벽이 허전해서 붙여놓았을 뿐이라고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다시 맞은 설. 이번에는 사촌 오빠가 세배를 다녀갔다고 한다. 당질은 한의대와 경찰대와 서울대를 모두 합격해서 서울대로 가기로 했단다. 이 이야기를 눈앞에서 들었다는 동생이 전화를 해왔다. ‘언니야, 샘나서 안 되겠다. 조기교육 들어가자.’ 아니, 이제 겨우 100일 지난 아기에게 무슨 조기교육? 이런 젖먹이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나부터가 행복하지 못하겠다.

  나의 남편은 총기있게 생겼다. 그런데 나는 남편처럼 공부 안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남편처럼 초저녁잠이 많은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시험을 보러 가면 어이없이 높은 점수를 받아오곤 하는 걸로 봐서는 정말 똑똑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남편은 명문대를 졸업하지 못했다. 큰시험은 총기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는데, 남편은 든직하게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러면서도 나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운명이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나의 아들은 이왕 행복할 거, 명문대를 나와서 좋은 여자를 만나 알콩달콩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육아서를 출간하기도 편하지 않겠는가.


※   아이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쓴 『기다리는 부모가 아이를 꿈꾸게 한다』의 저자는 자녀가 명문대생이 아니라서 출판사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  소동파는 자식이 태어났을 때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한다.


남들은 모두 자식 낳아 총명하길 바라지만
나는 총명 때문에 일생을 망쳤구나
그저 내 아이는 어리석고 노둔하여
재앙이나 난관 없이 공경에 이르기를


크기변환_2012-04-11 16.37.06.jpg 


생후 204일.

아기들은 유모차 타고 바깥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던데

우리 아기는 아닌 것 같다.

인상 팍 쓰고, 엄마와 눈도 안 맞추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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