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실에 아기가 등장한다. 엄마가 담요 위에 아기를 내려 놓으면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기가 하는 행동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들은 질문을 한다. 첫 이가 났는지, 안 보이는 사이 얼마나 자랐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질문하면, 동행한 엄마가 답해준다. 뒤집기나 장난감을 찾아내는 새로운 성취를 보일 때마다 진심으로 기뻐해준다.

캐나다에서 시작한 공감의 뿌리(Roots of Empathy)라는 프로그램의 풍경이다. 이 프로그램은 생후 1년 미만의 갓난 아기를 학교에 초대하여 아이들의 공감 능력을 키워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놀랍게도 이 프로그램이 진행된 한 학년 동안 또래 괴롭힘이 줄고, 다른 유형의 공격행동도 줄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더불어 또래 아이들에 대한 공감 수준이 높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이 실시된 지 10년이 지나면서 캐나다 전역에서 집단 괴롭힘이나 따돌림 현상이 90%나 줄어드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아기와 공감의 힘이다.

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세상을 바꾼다는 <공감의 뿌리>라는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공감이 됐다. 그 상황이 나에게도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시댁과 좋지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종교문제였다. 내게 시댁의 종교는 너무 이질적인 것이었고, 시댁에서는 그런 내가 너무 낯설기만 한 존재였다. 시부모님의 종교는 너무 강력했고, 나는 그런 시댁에 대한 거부감이 강력했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 훨씬 이전부터 종교문제로 부모님과 거의 절연한 상태였고, 거의 왕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사고(!)를 친 상태였고, 어른들의 허락여부가 우리가 같이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여서 그냥 같이 살기 시작했다. 물론 양쪽 집안에서는 각자 다른 이유로 상당한 진통이 좀 있었다.

나는 평소 성격 대로 편리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차라리 잘 됐다. 결혼해서 시댁과의 관계를 힘들어하는 친구들 이야기를들으며 어쩌면 잘 된 일이라고 자위도 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다가도 가끔 마음이 한 없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다른 건 몰라도 어른들의 사랑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많이 받아왔던 나였다. 그런데 시댁 어른들에게 냉랭한 대접이라니어떨 땐 한 없이 서글펐다. 서운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친정 부모님의 끊임없는 세뇌 때문에 최소한의 도리는 하려고 노력을 했다. (, 내가 부모님 말을 잘 듣는 그런 애가 아닌데, 조금씩 철들어 가는 건가?) 평소에는 못해도 명절 때나 생신 때만큼은 내 성심 성의껏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는 냉랭한 공간은 여전히 건재했다. 사실 뭐라고 구박하는 것도 아니고, 싫은 소리 하시는 것도 아닌데, 괜히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떨군 적도 있었고, 밥을 먹어도 꼭 체해서 급히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러다가 우리 딸이 태어나자 관계의 지형이 좀 달라지고 있다. 전에는 시댁에 가기만 하면, 어떻게 하면 빨리 올라올까 이런 궁리를 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한 끼 더 얻어 먹고 올까 궁리를 한다. 예전엔 당일치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한두 밤 정도는 편히 쉬다 온다. 그 공은 우리 아이에게 있다. 시댁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냉랭하고 어색한 공간을 우리 딸이 다 메워주고 있다. 우리 딸이 시부모님과 나의 유일한 교집합이고, 아이는 토크박스처럼 계속 이야기 거리를 던지고 폭소하게 만든다.

낯가림이 없는데다 워낙에 붙임성이 좋고, 최근에 방언 터지듯 말문이 열리면서 이번 설에도 활약이 대단했다. 무뚝뚝하기로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는 따놓은 당상인 시아버지를 무장해제시켰다. 표정변화도 없고, 감정표현은 아꼈다 어디다 쓰시려는 지 지독히도 아끼시는 시아버지도 재롱 떠는 손녀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다. 시도 때도 없이 할아버지를 부르는 손녀의 부름에 답해야 하고, 요즘 최고의 컨디션을 구가하는 딸 아이의 재롱에 리액션을 해야 하고, 딸 아이의 밀착 스킨쉽에 녹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표정은 별로 변화가 없다. 그냥 그 안의 변화를 내가 느끼는 것 뿐…)

딸의 역할 덕분에 이번 설에는 대화도 한두 마디 나눈 것도 같다. (그런데, 나도 너무 당황을 해서 어떤 대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그냥 대화를 했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아이가 세상을 바꾸는 지는 몰라도 우리집은 일단 바꿨다.

솔직히 아직도 시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을 완전히 가셨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는 의외로 뒤끝이 좀 있고, 그렇게 착한 인간이 못 된다.) 하지만, 시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많이 변했다. 내가 서운한 만큼 시부모님도 서운하셨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시부모님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그 분들의 인생을 봤을 때 우리를 바라보는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알 거 같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차가운 공간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소율이.jpg » 시댁에서 최고의 엔터테이너 역할을 한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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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30대 중반, 뒤늦게 남편을 만났다. 덜컥 생긴 아기 덕분에 근사한 연애와 결혼식은 건너뛰고, 아이 아빠와 전격 육아공동체를 결성해 살고 있다. '부자 아빠=좋은 아빠', '육아=돈'이 되어버린 세상에 쥐뿔도 없으면서 아이를 만났고, 어쩔 수 없이 '돈 없이 아기 키우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엔 돈이 없어 선택한 가난한 육아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경험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더불어 몸의 본능적인 감각에 어렴풋이 눈을 뜨 고 있으며, 지구에 민폐를 덜 끼치는 생활, 마을공동체에 재미를 들여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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