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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가을 하늘 아래를 걸을 때마다 왜 이런 말이 그토록 오래전부터 생겨났는지
온 마음과 온 몸으로 깨닫게 된다.
넓고 푸르고 깊은 하늘, 풍성하고 아름다운 들판, 선선한 바람과 가을꽃향기,
거기에 자체 BGM으로 풀벌레 소리까지 곁들여지면
영원히 이 순간을 붙잡고 싶은 때가 바로 추석 즈음이다.
맛있는 건 또 왜 그리 많은지, 무심코 봐왔던 가을 먹을거리들이
요즘은 다시 새롭게 보인다.

초등 1학년과 6학년이 있는 우리집은
각 계절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주제로 글쓰고 그림그리기를 자주 하는데
제철 음식들은 그 계절에 가장 맛나고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으니
아이들에겐 가장 친근한 표현 소재가 된다.
문학이나 미술을 일상에서 따로 떼내어 '공부'로 만들지 말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즐기고 표현할 순 없을까?
뜨거운 여름을 지나며 영근 햇곡식들로 차린 추석 상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림'이고
그 속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와 정서라는 '스토리'까지 듬뿍 담겨있다.
어른들에겐 몸과 마음이 바쁜 추석이지만,
아이들과 연휴를 함께 보내면서 이 좋은 계절이 주는 감성을 최대한 즐겨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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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작은 아이가 생협에서 배달된 밤을 만져보며 이런 말을 했다.

- 밤은 왜 이렇게 딴딴하지? 갑옷 입은 거 같아. 장수풍뎅이랑 비슷하네?
-  밤 자기가 (껍질을) 이렇게 만든 거야?

밤을 보고 쏟아내는 아이의 폭풍 질문에, 흔하게 생각해왔던 밤을 다시
찬찬히 보게 된다. 어쩜 이런 색깔과 몸매를 가졌을까..?
<밤>을 주제로 아이에게 글쓰기를 시켜볼까 시도했다가 역시 실패했다.
이럴 땐, 아이가 한 말들을 어른이 기록해 두면 좋다.
아이와 함께 본 밤 사진에 덧붙여, 그날 아이가 한 말들을 함께 써서
프린트해 거실 벽에 붙여둔다. 
오며가며 가족이 함께 읽고 공감하며, 각자의 감상과 의견을 말하다 보면
아이는 자기가 무심코 한 말들이 '글'이 되었을 때의 가치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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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텃밭에서 아이와 함께 처음으로 감자를 수확한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심고 가꾼 감자를 땅 속에서 발견했을 때 엄청 기뻐했다.

작은 아기 감자들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 요리하기 전에 손에 올려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에다  유명한 <감자꽃> 동시를 덧붙여 프린트해 부엌에 붙여두었더니

오마가며 읽고 좋아한다.


문학교육과 글쓰기의 시작은 책보다 아이들의 삶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과 글도 누군가의 작품처럼 읽혀지고 공감받을 수 있다면

스스로 써 보고 싶은 의욕을 조금씩 키워가게 된다.

아이들이 무심코 흘리는 말들과 그 대상을 함께 묶어 정리해 보여주다보면

언젠가는 아이들 스스로가 기록을 시작하게 될 거다.

추석은 몇 명 안되는 핵가족의 일상을 벗어나 다양한 친척들을 만나 교류하는

좋은 기회이니 함께 이런 시간을 가지며 가족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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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맛보는 여러 과일들 중에 배는 특히 가을스럽고
동북아시아의 자연을 반영하는 맛을 자랑한다.
색감, 맛, 풍성한 자태 모두가 그런데
차례상에 올랐을 때의 비주얼과 존재감을 떠올려 보면
이 계절에 빠질 수 없는, 빠져서는 안되는 완소 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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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배밭에 다녀온 뒤, 두 아이가 그린 배 그림이다.
왼쪽이 1학년 아들, 오른쪽이 6학년 딸이 그린 것인데
아들이 그린 것은 배보다 감자에 가깝다는 가족들의 소감..^^

명절에 온 친척이 모이면 한 가지 과일이나 음식을 남녀노소 모두 다같이 그려보면
어떨까?  배, 사과, 밤, 고구마 등 중에 하나를 정해서
거실 벽에 큰 종이를 붙여두고 시간이 나는 사람마다 각자 그려보면 재밌을 거 같다.
2,3세살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배 하나를 그려도 다 제각각일테니
한 장의 그림으로 이야기가 풍성해지지 않을까?
인기투표를 해 보거나(맘에 드는 그림에 스티커 붙이기?)
헤어질 때엔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다음 명절에는 어떤 음식을 또 그려볼지
아이들과 정해보면 재밌을 거 같다. 글보다는 그림이 아이도 어른들도
부담없어하는데, 그림에 간단한 글을 덧붙이는 연습을 하다보면 자연히 실력이 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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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가족이 모인다면

논과 밭에도 나갈 수 있을테니 아이들에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더할나위없는 기회다.

먹을거리외에도 논밭의 식물들, 곤충들, 꽃들 뭐든지 그리고 만들고 쓸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잠자리는 아이들에게 가장 친근한 곤충이다.

작은 아이가 빙글빙글 돌려 그린 잠자리 눈 모양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에릭 칼의 어떤 그림책에서 잠자리를 아주 근사하게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잠자리는 정말 비주얼이 뛰어난 곤충인 것 같다.

글쓰기와 그림의 소재로 훌륭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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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벼가 푸른빛이었을 때, 아이들과 초가을 저녁 논에 간 일이 있었다.

드넓은 논 위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는데

큰아이가 그때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거실 달력에 붙여 보고 있다.


가을이 정말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것

아이들에게 무한한 감성과 상상력을 심어줄 수 있는 소중한 시기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좋은 계절, 그리고 추석이라는 명절에

근사한 자연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만들었으면..

음식 만들기를 하나 줄이는 대신, 그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

돈들여 사람많은 곳에 가는 대신,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감성을 아이들과 함께 교감할 수 있다면

훨씬 행복하고 교육적인 명절이 되지 않을까.

글과 그림과 음악이 모두 놀이가 될 수 있는 그런 추석이면 좋겠다.


베이비트리 여러분, 해외에서 추석을 맞으시는 분들,

모두모두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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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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