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자료사진 백만 년 만에 본 멜로 드라마에 감성이 말랑말랑

 

언젠가부터 드라마를 챙겨볼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시작한 뒤부터였던 것 같다. 아이 낳기 전에는 아니 첫째 아이를 임신할 때까지만 해도 남편과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다 눈물 콧물 쏟기도 했다. 그렇게 한판 시원하게 울고 나면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아이들이 내가 옆에 누워있지 않으면 자주 깨 엄마를 찾았고, 그런 아이들 옆에 누워있다 보면 나도 어느샌가 잠들곤 했다. 한참 자다 일어나면 보통 새벽 1~2시. 나는 다시 자거나 아이폰으로 인터넷 카페를 방문하거나 책을 좀 보다 잠들었다. 주변의 아는 동생들이나 친구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더라도 챙겨 보지 못한 드라마를 챙겨보곤 했다. 그런데 난 꼭 그렇게 하고싶지는 않았다. 사실 너무 피곤했다. 잠을 자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잘도 흘렀다. 밤 10시 드라마는 2009년에 방영했던 <선덕여왕>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뒤 꼬박꼬박 챙겨 본 드라마가 생각나지 않는다. 남편이 좋아하고 자주 보는 사극을 아이들이 잘 자는 어느 날 띄엄띄엄 본 것 외에는.


 

출근을 하고 그동안 보고 싶었던 선·후배들과 수다 떨 시간도 늘었다. 그런데 만나는 자리마다 ‘수애’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 나온 여자 주인공이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에 걸렸는데, 건망증에 걸린 자신들 얘기를 하며 “나도 치매 아니야? 아무래도 치매야. 치매...나도 수애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까르르 웃곤 했다. 어떤 선배는 진부한 줄거리일 수 있는데 김수현 작가만의 뭔가가 있다고 얘기했고, 어떤 선배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삼류 주인공 같지 않고 다들 격이 있어 매력 있다고 했다. 또 <뿌리깊은 나무>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숨막히는 스릴러 같은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줄거리를 잘 이해할 수 없다며 다들 꼭 보라 얘기했다. 드라마를 보지 않으니 대화에 참여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지난주 토요일 밤 11시. 모처럼 아이 둘 다 깊이 잠들었다. 아이들이 너저분하게 어지럽혀놓은 장난감을 정리하고 싱크대에 놓인 그릇 몇 개를 씻고 나니 밤 12시가 됐다. 웬 일인지 아이들이 한번은 일어나 "엄마"를 부를 만한데 조금 칭얼대다 잠들고 다시 칭얼대다 잠들고를 반복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 둘 사이에 누웠다. 그러나 출근한 뒤 시작된 어깨 통증으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일 안 하다 일하려니 온 몸이 뻐근하다. 몇 주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책을 보려다 어깨도 눈도 아픈데 무슨 책인가 싶어 텔레비전을 켰다. 갑자기 <천일의 약속>을 보고 싶었다. 인터넷 TV에서 <천일의 약속> 1회를 다운로드 받아 보기 시작했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듯한 배우들의 대사,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세련된 영상, 그리고 무엇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수애씨를 비롯한 예쁘고 잘 생긴 배우들의 연기에 내 눈은 화면에 고정됐다. 지지리도 불행한 서연의 운명에, 1년이라는 짧고도 유예된 시간에 강렬한 사랑을 나누는 지형과 서연의 사랑에, 또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순애보 향기의 슬픔에 난 빠져들기 시작했다. 1회가 끝나고 2회로 넘어가 3회까지.... 오랜만에 보는 멜로드라마 삼매경에 빠져 난 새벽을 맞았다. 무슨 일인지 아이 둘 다 깨지 않고 잠을 잘 자줬다. 엄마가 드라마에 빠져든 걸 안 것일까...분명 깰 시간이 넘었는데...아이들에게 고마웠다. 몹시. 
 

사실 드라마를 보면서 고개가 갸웃거리는 면도 없지 않았다. 서른 살인데 너무 어른스럽고 성숙한 서연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서른 살의 나이에 차도 몰고 고급 옷을 잘 소화해내는 것이 뭔가 현실적이지 않았다. 또 지형의 한 여자에 대한 순애보적 사랑도, 부잣집의 딸로 태어난 향기의 자존심까지 다 접은 사랑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주인공들이 너무 차분하고 무겁고 애잔해서 기분을 축축 가라앉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백만 년 만에 멜로 드라마를 보는 내겐 마냥 좋기만 했다. 싸우고 이기고 복수하고 세력 간의 갈등을 다루는 사극만 보다 오랜만에 심리적 상태를 섬세하게 그리는 드라마를 보니 잘 쓰인 소설을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불 꺼진 거실에서 마치 결혼 전 혼자 앉아 드라마를 보던 그때처럼,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사이 드라마를 보는 그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드라마로 감성을 충전하고 ’20대의 나’ ‘서른 살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일요일인데도 아침 7시면 자동으로 눈을 뜨는 아들 녀석과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딸과 부대낄 시간이 두려웠지만, 그 순간만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냥 그렇게 혼자서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을 시간이 내겐 필요했던 것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에 걸쳐 아이들이 잠든 시간 틈틈이 나는 <천일의 약속> 6회까지 시청했다. 드라마로 감성을 충전한 덕분일까. “약속 있어 늦게 들어온다”는 말만 하고 저녁 9시가 다 되도록 안 나타나는 남편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엄마 상황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게임하고 싶다” “책 읽어달라” “업어서 재워달라”고 요구 사항도 다양한 딸에게도 화내지 않고 다정하게 대했다. 중이염에 걸려 자주 칭얼대고 잠자기 직전 세레모니를 격하게 해준 아들에게도 침착하게 대했다.
 
아... 딱딱하게 화석처럼 굳어가던 내 감성이 모처럼 말랑말랑해졌었나보다. 이 감성을 바탕으로 내 앞에 놓인 복잡하고 어려운 숙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나가야지. 복귀 뒤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잘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양선아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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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썼으며 현재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교육부 출입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이메일 : anmadang@hani.co.kr       트위터 : anmadan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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