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난, 나에게 넌

조회수 4554 추천수 10 2015.05.08 03:13:43

숱한 논문을 뒤적이며 알게 된 사실. 
언젯적부터였는지 알 수도 없는 그 언젠가부터
너는 이미 내 안에서 짝짝이 다리, 짝짝이 발로 자라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너를 품는 내내 네 건강을 한번도 의심한 적 없었을 만큼
너는 참으로 열심히 내 뱃속에서 뛰고 굴렀지. 
배꼽 옆에서 만져지는 네 발을 내 손으로 꾹 누르면 타다닥, 도망쳐가던 그 순간들,
한 시간이 멀다하고 해대는 그 딸꾹질마저 나는 네가 건강하단 증거라고 여겼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네가 잘 때 자꾸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이 다리 때문일까봐,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울음이 다리 때문일까봐, 그 다리 때문에 기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할까봐 속으로 앓으며 걱정하는 우리를 알아차렸던 걸까. 너는 100일도 되기 전에 뒤집고, 엎드려 목을 가누었다.


5개월엔 더운 날 꽉 조이는 압박스타킹을 신고도 헤헤, 웃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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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엔 그 울퉁불퉁한 발바닥을 힘껏 딛어 혼자 서서 물을 마셨다.

너무 빨리 걷기 시작하면 더 아프게 될까봐 걸음마도 안 떼어줬는데, 

너는 첫돌이 되기 전에 이미 혼자 열 걸음, 스무 걸음도 넘게 걸었지.


네가 뒹굴거리며 놀다 그 큰 오른다리를 번쩍 들어 올릴 때마다, 
나는 어쩐지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며 살아갈,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너를 그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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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지레 포기하지 않고 늘 새로 도전하며 무엇에든 열심이어서.

고맙다.
절뚝이는 다리로도 경쾌하게 콧노래 흥얼거리며 바깥 놀이를 즐기는 아이라서.

고맙다.
매일 밤 내가 네게 거는 주문처럼 '아프지 않고 좋은 꿈 꾸며' 살아줘서.


나는 네 덕분에 글을 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살고 있다.

네가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단 조금 더 나아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네가 잠든 사이에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한다.
네 존재가, 네 삶이 나에게 응원이 되는 만큼, 
나의 삶 역시 너에게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해, 산.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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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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