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위한 교육은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교사 워크숍이 한창인 강의실.
스크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2011년 9월 7일. 간식시간.
6세반 종수(가명)는 간식시간에 나온 초록색 서울우유 우유팩에 적힌 글자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으며
'하.얀.우.유.'라고 읽었다."
아이들의 관심과 흥미에 기반을 둔 능동적 학습을 강조하는 유아교육 프로그램에서 교사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보여주는 말과 행동을 일화로 기록하며 민감하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사 워크숍에서도 우리는 위의 일화를 스크린에 띄워놓고 종수가 간식시간에 보여준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교사는 이런 종수를 위해 어떤 교육적 지원을 해야 하는지 토론합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유아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에 관한 워크숍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교사들은 이 상황에서 교사로서 취해야 할 자세와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서’, ‘울’, ‘우’, ‘유’의 글자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친구의 사진이 담긴 이름표, 그림단어카드 등을 서울우유 팩과 함께 늘어놓고 같은 글자 찾아내 기 게임을 해보겠다는 교사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봉지나 장난감 포장지 등을 모아 그 이름들을 오려 도화지에 붙이며, 익숙하고 흥미로운 글자들을 다뤄보는 소모둠 활동을 준비해보겠다는 교사도 있었고요. 그러던 중 한 교사가 “아니, 6살짜리가 그것도 못 읽으면 어떡하나! 한 글자 한 글자 큰 소리로 읽으며 바둑판 공책에 백 번씩 쓰게 해요!”라며 농을 던졌습니다. 강의실에 와하하~한바탕 폭소가 터졌습니다.
» 한겨레 자료 사진
만 5세, 우리 나이로 여섯 살인 종수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합니다. 사실 네 글자 중에서 정확하게 읽어 낸 우.유. 두 글자도 초록색 우유팩에는 하얀 우유가 들어있더라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유추한 것일 뿐이지요. 하지만 문화인으로서 종수의 창창한 앞날은 이런 종수를 어른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아주느냐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질 겁니다. 종수가 아직 한글을 ‘모른다’에 초점을 맞추고 한글을 깨치는 일에 주력할 것인가, 아님 종수가 ‘문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에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사실을 함께 축하하고 지원할 것인가. 종수를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이 어떤 눈으로 이 아이를 보느냐는 앞으로 종수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고요.
교육학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종수는 지금 언어발달 영역에 있어 무척 많은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수는 현재 인쇄물에 관심을 보이며 상품에 인쇄된 글자가 그 상품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글자 하나는 한 음절의 소리를 낸다는 심오한 사실도 이미 알고 있네요! 종수는 문해력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지극히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주변 어른들이 함께 기뻐하고 응원해주어야 할 사실입니다. 유아기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이 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글을 줄줄 읽고 쓰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글을 읽고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는 일일 겁니다. 어른들의 진심어린 응원과 교육적 지원으로 인해 아이는 자기 주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글’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될 것이며, ‘글’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나게 될 것이고요. 또한 주변 어른들의 애정 어린 응원과 지지는 아이의 자존감을 쑥쑥 키워 나와 남을 존중하고 당당한 자신감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게 할 것입니다. 교육이란 아이가 ‘못하는 것’에 집중하여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해내게 만드는 일이 아닌, 아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 자기 삶을 즐기며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교육학자로서는 이런 태평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부모의 입장이 되면 저 역시도 늘 조급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 아이는 세 살에 한글을 깨쳤네, 네 살에 깨쳤네 하는 옆집 아줌마들의 이야기에 우리 엄마들은 쉽게 일희일비하게 됩니다. 아이는 그냥 제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는데, 어떨 때는 우리 아이 천재 아니냐 하다가, 또 어떨 때는 어디가 모자란 것 아니냐 하면서 호들갑을 떨게 되지요. 제 아이의 경우였다면, 저 역시 우선 한글교재와 바둑판 공책부터 마련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깐, 아이에게 당장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되짚어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일찍 글을 깨쳤냐가 아니라, 글을 읽고 쓰는 즐거움을 얻는 일과 그 과정을 통해 얻는 자존감과 자신감의 형성입니다. 글의 즐거움을 아는 일이나 자존감 및 자신감의 형성은 화려한 강사진이 꾸려진 서울 강남 유명 학원에 고액의 수강료를 지불해도 절대 속성으로는 얻을 수 없는 삶의 자산일 테니까요.
3% 미만의 세계 최저 수준의 문맹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연평균 성인 독서량은 고작 10.9권이며,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3.5명은 일 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하네요.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한다는 우리.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삶을 위한 교육, 생활을 위한 교육. 아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 보여주는 가능성의 긍정으로부터 시작 될 수 있을 겁니다.
차상진 sangjin.c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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