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칠순 할머니가 그림으로 들려주는 ‘그땐 그랬지’

베이비트리 2019. 02. 15
조회수 1659 추천수 0
11남매 중 아홉째 이재연 할머니
가난한 어린시절 정감있게 그려
생활사·풍속사 자료로도 ‘생생’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재연 글·그림/소동·1만6500원


볼일이 보고 싶어지면 걱정이 태산이었어. 변소간이 집에서 외따로 떨어져 낮에도 들어가기 무서웠거든. 송판 두 개 걸쳐놓아 발을 헛디디면 인분 속으로 빠져. 요즘같은 화장지가 있었나 어디. 지푸라기를 보드랍게 비벼서 썼지. 나중엔 과수원 배 봉지, 헌책을 매달아 한 장씩 닦았지.

목화솜을 두껍게 넣은 광목이불의 홑청을 시침질하는 어머니. 바로 위 언니, 나, 남동생은 광목이불 놀이터에서 뒹굴고 장난치며 어머니 일을 방해했다. 소동 제공
목화솜을 두껍게 넣은 광목이불의 홑청을 시침질하는 어머니. 바로 위 언니, 나, 남동생은 광목이불 놀이터에서 뒹굴고 장난치며 어머니 일을 방해했다. 소동 제공

난 11남매 중 아홉째, 배과수원집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지. 가난한 농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남들처럼 혼인해 남편과 아들 둘 뒷바라지를 하며 평생을 살았어. 칠십이 돼서야 그림 그리는 재미에 빠졌지 뭐야. 희한한 게 그림을 그릴수록 고향 생각이 또렷해져서 아주 별난 게 다 기억이 나. 어린이들은 까마득한 옛일로 치겠지만, 알고 보면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보다도 훨씬 가까운 과거야. 내 그림을 보고 할머니한테 어릴 적 얘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전래동화보다 재밌는 얘기가 술술 나올 거야. ‘그땐 그랬지’ 할 걸. 학교에서 전래놀이를 배우고 세시풍습에 대한 책을 필독도서로 읽힌다고 들었다만, 할미가 들려주는 이야기만큼 생생하겠어?

이 책에는 밥 먹고 손주 보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불철주야 그린 63점이 실렸네. 농한기인 겨울부터 시작해 농번기인 봄, 여름, 가을…, 농경 절기별로 펼쳐놓으니 50년대에서 70년대 생활풍경이 그대로 담긴 풍속화가 됐어. 소가 멍에를 메고 쟁기질을 하는 모습, 양쪽에서 못줄을 잡고 “어이” 소리치면 일렬로 늘어선 일꾼들이 허리를 구부려 줄에 맞춰 모를 심는 광경, 발로 밟아 볏단을 털어내는 ‘와롱와롱’ 탈곡기 타작 등 지금은 볼 수 없지.

놀다가 목마르면 고드름을 따먹었다. 마당에 그림도 그리고 놀았다. 소동 제공
놀다가 목마르면 고드름을 따먹었다. 마당에 그림도 그리고 놀았다. 소동 제공

어릴 땐 자연이 놀이터였지. 고무줄, 줄넘기, 사방치기뿐이랴. 한겨울 얼어붙은 빈논은 시청광장 스케이트장보다 신나는 썰매장이었단다. 철사날 붙여 만든 썰매를 밀어주다 꽈당, 얼음이 깨져 빠지는 바람에 덜덜. 간식 얘기도 빼놓을 수 없지. 감자 썩혀 만든 개떡, 쑥에 콩가루를 버무린 쑥버무리, 달달 볶은 메뚜기로 허기를 채웠지. 요즘 말로 ‘웰빙’이랄까. 술지게미에 사카린을 타서 먹다 비틀댄 적도….

동네 유일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마당에 몰려든 동네사람들. 어머니가 잠깐 밭에 다녀오는 사이 텔레비전을 도둑맞았다. 소동 제공
동네 유일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마당에 몰려든 동네사람들. 어머니가 잠깐 밭에 다녀오는 사이 텔레비전을 도둑맞았다. 소동 제공

남녀차별이 버젓하던 때라 설움도 많았지. 놋그릇과 반달숟가락이 떠올라. 놋그릇을 재 묻힌 볏짚으로 닦는 건 언니들 일이었지만, 놋그릇은 오빠랑 남동생 차지였어.

가마솥 바닥 누룽지를 긁어대던 나의 반달 숟가락. 소동 제공
가마솥 바닥 누룽지를 긁어대던 나의 반달 숟가락. 소동 제공

가마솥 보리쌀 위에 얹은 쌀밥은 남자형제한테 돌아가고, 내 숟가락은 솥바닥 누룽지를 긁다가 닳아 반달이 됐지.

큰언니 시집가던 날. 소동 제공
큰언니 시집가던 날. 소동 제공

큰언니 시집가던 날, 그을음 피어오르는 석유등잔 아래 졸며 공부했던 밤, 분유통에 튀길 곡식을 담아 줄세워놓고 뻥튀기를 기다리던 날, 음력 초사흘날이면 장독대에 손수 찐 고사떡을 놓고 11남매의 안녕을 빌었던 어머니, 닭똥집을 갈아 약을 만들어주시던 아버지 상여 나가던 날, 모든 게 아스라하구나. 7살 이상.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그림 소동 제공

겨울 농한기, 사랑방에 동네사람들이 모여 새끼를 꼬는 모습. 소동 제공
겨울 농한기, 사랑방에 동네사람들이 모여 새끼를 꼬는 모습. 소동 제공

학교 교실과 복도를 청소하던 모습. 소동 제공
학교 교실과 복도를 청소하던 모습. 소동 제공

내 친구 순경이와 아카시아 줄기로 파마하며 놀던 때가 그립다. 소동 제공
내 친구 순경이와 아카시아 줄기로 파마하며 놀던 때가 그립다. 소동 제공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베이비트리
안녕하세요, 베이비트리 운영자입니다. 꾸벅~ 놀이·교육학자 + 소아과 전문의 + 한방소아과 한의사 + 한겨레 기자 + 유쾌발랄 블로거들이 똘똥 뭉친 베이비트리,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혼자서 꼭꼭 싸놓지 마세요. 괜찮은 육아정보도 좋고, 남편과의 갈등도 좋아요. 베이비트리 가족들에게 풀어놓으세요. ^^
이메일 : hanispecial@hani.co.kr       트위터 : ibabytree       페이스북 : babytree      
홈페이지 : http://babytree.hani.co.kr

최신글




  • [3월 15일 어린이 청소년 새 책] 둘리틀 박사의 퍼들비 모험 외[3월 15일 어린이 청소년 새 책] 둘리틀 박사의 퍼들비 모험 외

    베이비트리 | 2019. 03. 15

     둘리틀 박사의 퍼들비 모험 <둘리틀 박사와 초록 카나리아>(11권) <둘리틀 박사의 퍼들비 모험>(12권)이 나와 둘리틀 박사의 모험 시리즈가 완간됐다. 1차 대전에 참전한 휴 로프팅이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둘리틀 박사 이야...

  • 선과 색이 그려낸 나만의 멋진 개성선과 색이 그려낸 나만의 멋진 개성

    베이비트리 | 2019. 03. 15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황성혜 지음/달그림·1만8000원사람은 모두 닮은 듯하면서 다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인정하기는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개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이 책에서 즐겨 이야...

  • 흥! 쳇! 으! 나쁜말 삼총사도 필요할 때가 있을걸흥! 쳇! 으! 나쁜말 삼총사도 필요할 때가 있을걸

    권귀순 | 2019. 03. 15

    동음이의어 ‘말’과 ‘말’로 빚은개성 넘치는 말들의 이야기유머 가득한 그림 ‘웃음꽃’말들이 사는 나라윤여림 글, 최미란 그림/스콜라·1만3800원【말:】과 【말】은 같은 소리가 나지만, 길고 짧음에 따라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다. <말이 사는 ...

  • 남사당놀이 신명판 서글픈 어린 광대남사당놀이 신명판 서글픈 어린 광대

    권귀순 | 2019. 03. 08

     줄 타는 아이 어름 삐리 신지은 지음, 정지윤 그림/보리·1만5000원 남사당패의 놀이판을 생생하게 그려낸 <줄 타는 아이 어름 삐리>가 11년 만에 출판사를 바꿔 다시 나왔다. 남사당놀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광대들이 ...

  • 린 할머니네 마을에 복숭아가 열리면린 할머니네 마을에 복숭아가 열리면

    베이비트리 | 2019. 03. 08

     린할머니의 복숭아나무탕무니우 지음, 조윤진 옮김/보림·1만2000원복숭아나무는 꽃이 피고 잎이 지면 열매가 열린다. 이듬해 봄볕이 고이면 꽃도 발그레 다시 볼을 내민다. 이 단순한 자연의 이치를 머금은 린 할머니의 놀라운 ‘나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