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민이를 키울 때
나는 기본적으로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민이가 두 돌이 됐을 무렵 시어머니가 해외여행을 떠나고 
처음으로 나 혼자 민이를 돌보게 된 적이 있다.
지인은 아이를 혼자 돌보려면 엄청 힘들 거라고 겁을 줬다.
그런데 민이와 둘만 남았을 때 힘들기는커녕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민이에게 간식을 건네 주며 "먹어" 한 마디를 하고
조용히 간식을 먹는 민이를 나는 또 말없이 바라보던
그때의 광경이 가슴 아프게 남아 있다.
당시 고부 갈등으로 나의 우울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지만
그게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다엘을 키우면서도 나는 여전히 민이에게 했던 방식의
육아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엘과 눈맞춤 하며 같이 웃고, 놀고, 
아이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본 적이 몇 번이나 되나?
지난 글에 다엘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쓰면서
나 자신의 오만함에 한껏 취해 있었다.
내 아들이 이렇게 예쁘게 잘 컸다고.

그러나 다엘이 엄마의 이상에 닿기 위해
혼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다엘의 이유 모를 두려움은 더욱 커졌고
분리불안은 나아지는 게 아니라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맘이 안 맞으면 쌩 하니 화를 내며 급 냉랭해지는 습관이 있는데
이를 다엘에게도 그대로 되풀이해왔다.
다엘은 그럴 때 내게 ‘엄춘기(엄마의 사춘기)’라는 말을 하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푸근하게 아이가 안길 수 있는 엄마가 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아이에게 위로 받는 어른 꼴이 됐다.
급기야 다엘은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무섭다고 이불을 머리에 덮어쓰기까지 했다.

엄마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아픔은 어디에서 오나?
"가족끼리는 실망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다시 좋아지기도 하는 거야.
좋은 말만 하고 사는 게 아니야."
선생님의 이런 조언도 다엘에게 닿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성취욕이 강한 어머니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늘 죽을 힘을 다했다.
공부 잘하는 착한 딸이 되기 위해 항상 몸부림 쳤다.
돌아보면 대학 시절까지 나는 황폐한 사람이었다.
교생 실습을 나가서 학생들 앞에 섰을 때에야 처음으로
내게도 유쾌하고 잘 웃고 활달한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늘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듯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100% 치유하긴 어렵지만
자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서부터 치유의 길이 열린다고 한다.
“다엘, 뭘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엄마는 있는 그대로 너를 사랑해.”
안 해보던 얘기라 말하기도 듣기도 어색했을까?
나의 말에 다엘은 건성으로 답했다. 
“응, 정말 감동이야!”


옥잠화1.jpg » 땅에 떨어진 옥잠화 꽃송이, 다엘이 주워오다

자식 둔 사람은 절대 오만해선 안 된다고 한 옛 어른 말씀이
새삼스레 와 닿는다.
다른 어떤 일보다 아이를 우선순위에 두기 위해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아이와 눈 맞추고 웃어주고 진심을 다해 귀 기울이는 일,
아이가 원하면 모든 일 접고 당장 밖으로 나가 함께 뛰어 노는 일,
이를 지금 해야 한다는 것.

요즘은 잠 들기 전 다엘의 다리와 등을 맛사지 해주기 시작했다.
슬안, 족삼리, 위중 등 낯설고 이상한 이름의 성장점을 찾아 지압하면
다엘은 간지럽다고 발버둥치면서도 까르륵, 웃음소리가 넘친다.
잠들기 전 행복한 시간은 행복한 잠으로 이어지고
편안한 잠이 아이의 상처 난 마음을 달래준다고 한다.

다엘이 요즘 좋아하는 시간이 또 있다.
아파트 광장에서 엄마와 함께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시간이다.
온전히 아들에게 집중하는 엄마를 다엘은 그간 갖지 못했다.
지금껏 못 해본 놀이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하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라는 베이스 캠프를 확보한 아이만이
또래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다.
한 아이의 세상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세상 전체를 바꾸는 일이건만,
그간 아이 말고 어디에 우선순위를 뒀단 말인가?

청명한 가을에 나도 아들도 새롭게 태어난다.
사춘기는 ‘내가 나를 낳는 시기’라고 한다.
갱년기라는 말도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다엘, 우리 이 시간을 잘 지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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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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