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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unsplash>

 

큰 아이가 다섯 살일 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동안 여러 손길들과 나누어들었던 두 아이의 육아와 살림이 온전히 내 책임이 되었다. 육아와 살림을 전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기에 부담스럽고 힘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살림의 달인으로 대했다. 모든 요리법과 양육법을 알고 있을(엄마니까 당연히 알겠지) 거라고. 알아서 잘 할 거라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심신의 고단함이란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잦은 시행착오와 눈물바람을 지나 간신히 전업주부의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쯤, 귀에 이런 말이 날아왔다. “너 회사 그만두고 요즘 집에서 논다며?” 오랜만에 하는 친구와의 통화에서 최초로 출현했던 말. 집에서 논다며. 이 말이 귀를 거쳐 마음에 스며들 때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불쾌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뭐라 응수해야할지 몰랐던 나는 잠깐 숨소리를 내다가 , 나 집에서 놀아.”라고 답했다. 당시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가? 빨래를 개고 있었다.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두 손으로 열심히 빨래를 개고 있었으면서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다. 집에서 논다고.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은 온종일 가사노동을 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게 되는 전업주부의 위치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파고든다. 타인의 건강과 정신을 돌보는 일을 전담하는 집안의 돌봄노동자가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임금을 지불 받지 않는 비시장노동에 속하는 돌봄노동이 시장노동을 하는 이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자본의 언어로 논한다.

 

집안의 돌봄 노동자는 하는 일의 성과를 가시적인 성과로 보여줄 수 없고, 정해진 기준에 따른 보상으로 돌려받지 못한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식구들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아이를 키워내고 병자를 수발드는 일은 돈과 상관없는 사랑의 영역으로 규정된다.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편리한 분리주의이다. 자본은 남성들에게는 각자의 이기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내는 효율적인 시장에서 경쟁심을 최대한 끌어올려 성과를 내라고 추동하고, 여성들에게는 살벌한 경쟁의 장에 출전해야 하는 남성들의 지친 심신을 보살펴줄 따뜻한 가슴으로 존재하라고 추동한다. 이는 남성은 본래 도전적이고 경쟁적인 성향을 타고났고 여성은 본래 다정하고 남을 돌보기 좋아하는 성향을 타고났다는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양성이 인간이 가진 다양한 특성 중 중 오직 한 가지 특성에만 충실하도록 몰아간다. 남자는 이기심을, 여자는 이타심을 배양하도록 주입받는 것이다.

 

착한 사람의 딜레마라는 말이 있다.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은 일을 남을 위하는 선한 마음으로 누군가 떠맡게 되면 그 다음부터 그 일은 당연한 듯 그 사람이 해야 하는 일로 정해져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가슴>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타심을 전담하도록 자리 매김된 여성이 돌봄노동을 떠안게 되면서 무엇을 잃게 되는지, 반대로 돌봄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수치로 환산되는 일에만 집중했던 남성이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사례와 수치를 들어 조목조목 보여준다. 평생 동안 회사에서 일을 했던 독신남성은 은퇴할 때 퇴직금과 상당한 금액의 연금을 보장받는다. 반면 평생 세 아이를 키워낸 전업주부는 같은 시기에 이르렀을 때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질문은 이 시점에서 튀어나온다. 독신남성이 받게 되는 연금은 누가 내는 것인가? 답은 젊은 세대들, 즉 전업주부가 키워낸 아이들이다. 전업주부는 국가의 미래를 담당할 노동자를 키워내고도 자기가 키워낸 아이들이 사회에 하는 공헌에서 나오는 혜택(=연금)에서 제외된다. 직장생활을 했던 남편에게 돌아오는 연금의 일부를 나누어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남편의 부재나 남편의 의지, 또는 다른 상황들에 의해 못 받을 수 있는, 온전히 보장되어 있지 않은 권리다.

 

평생 이타심으로 타인을 돌보았지만 일만 떠맡을 뿐 정식으로 보답을 받지 못하게 되는 비시장 노동자의 딜레마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이 책의 특이점은 젠더 문제를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서 조명했다는 점이다. 요즘 인물 관련 서적 중 가장 잘 팔리는 책 1순위가 스티브 잡스, 2순위가 빌 게이츠라고 한다. 사람들의 존경이 장군이나 대통령, 종교인에서 돈을 버는 데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는 기업가로 옮겨간, 자본이 모든 것을 제치고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이런 시대에 젠더 문제를 조명하려면 인간적인 도리보다 자본의 언어를 동원하는 편이 더 강력한 효과를 낼 것이다. 인류가 이미 수치로 환산해보여주지 않으면 공감하지 못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자본이 인류에게 가장 잘 통하는 제 일의 언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인문학이나 사회학의 언어로는 대중의 마음에 접근할 수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가슴>을 읽으며 속이 후련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돈으로 환산된 보답을 받는 세상에서 홀로 동떨어져 이타심의 화신으로 살기를 권장 받으면서도 일상을 영위할 경제력을 부여받지 못하는 수많은 돌봄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언어를, 경제학이라는 무기를 쥐어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집에서 논다느니 맘충이니 하는 말들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아이와 가정을 위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업주부들에게, 집에서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전업주부를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편하게 먹고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가정과 아이를 돌보는 보이지 않는 가슴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누가 누구를 먹이고’, ‘살게’, 하고 있는지,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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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
헤드헌터, 번역가, 소설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지만 저의 제1 정체성은 언제나 ‘엄마'였습니다. 엄마 경력 12년에 접어들던 어느날,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너무 아등바등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연재 글을 바탕으로 에세이 <엄마의 독서>를 펴냈습니다. 2013년 < 모던 하트 >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장편소설 < 잠실동 사람들 >, < 맨얼굴의 사랑 >을 펴냈습니다.
이메일 : emma7503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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