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png » 책 ‘꽃들에게 희망을’

 

교사 시절, 수업 끝나는 종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친 적이 한 번 있었다.
시험이 끝난 뒤 첫 수업 때마다 아이들에게
영화나 책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그 날은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러
내가 수많은 나비 그림으로 칠판을 채우자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책 속에 등장하는 애벌레들은 경쟁사회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애벌레들은 자신의 몸으로 기둥을 만들어
서로를 짓밟고 위를 향해 끝없이 오르지만
누구도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모르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수 있음을,
이를 위해서는 서로를 짓밟으며 기어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같은 어둠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최근 사회 명사들이 죽음을 맞으며
‘부질없다’, ‘헛되다’와 같은 말을 남겼다는 보도를 들었다.
권력의 정점을 찍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이들이 남긴 말과
동화책 속 애벌레들의 삶이 어찌 이리 닮았는가.

 

교사로 지내면서 나는 넘치는 진심 속에 살았다.
소위 문제아라 일컬어지는 아이들도,
아니 그런 아이들일수록 내가 진심으로 다가가면
순도 100%의 진심으로 응답해주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학교 밖 세상으로 나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마치 어린아이 같은 실수를 연발했다.
이른바 ‘의례적 만남’, ‘적당한 거리 두기’에 너무 서툴렀다.
외교적인 언사를 할 줄 몰랐다.

 

이때 넘치는 친절을 보이며 사회운동에 뜻을 같이 한 이가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처음의 뜻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는데
그 시점은 자신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였다.
친정부적 행보를 이어가면서도
이에 반하는 사회운동의 현장에도 참석하여 지지를 보이는 등
갈등 없이 양립하는 가치관을 그를 통해 보았다.
이런 합리적 유연함(?)은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며 진화하고 있다.

 

이를 무조건 지지하는 또 다른 이들을 보면서,
처음엔 사람에 대한 호감 탓에
옳고 그름을 보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알게 된 건,
처음부터 옳고 그름이나 공정함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철학자 김진영씨는 이런 행태를 일컬어
‘선악의 경계를 자유로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라는 정의를 내렸고
나는 그의 명쾌한 표현에 무릎을 쳤다.
이는 경쟁과 자본을 최선의 수단으로 삼는
속물근성의 만화경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었다.

 

명예와 권력, 돈을 위해서라면 선한 웃음을 띤 얼굴로
약자에게 채찍 휘두르기를 서슴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가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한다.
이들은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니라
아예 성찰의 가능성을 지워버린 채
애벌레 기둥을 오르기로 선택한 자들이다.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기대는 접지만
다른 면에서 희망을 갖는다.
개개인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를 건드릴 때 오는 희망이다.
진실 추구의 유전자(마땅한 표현이 없으므로)는
내 후손을 통해 이어질 것이다.
권정생 님의 동화 ‘강아지똥’의 내용 처럼
아주 작은 아름다움 속에 우주의 기쁨을 길러내는 일을 상상한다.

 

13살인 다엘에게,
내가 물려주고 싶었던 핵심가치는 모두 전달했다는 것을
최근에 절감했다.
지금까지 내가 다엘에게 강조했던 건 아주 사소한 상황에서의 예의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갈 때 뒤에 오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라,
마트에서 내가 쓴 카트 안에 쓰레기 버린 건 없나 돌아봐라’ 등등.

 

며칠 전엔 다엘과 장을 보던 중
누군가 쏟아버린 할인쿠폰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걸 봤다.
귀찮다고 그냥 지나가는 내게 다엘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고는 뒤돌아가서 제자리에 꽂아놓았다.
말과 행동이 다른 엄마에게서
이런 아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야말로 희망이다.

 

마트 다엘1.jpg » 마트에서 할인쿠폰을 주워담는 다엘

 

사소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이는
다중인격을 양성하는 병리적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리라 믿는다.
그 삶은 세속적 명예와는 거리가 먼 고난의 행군이 될 테지만
커다란 선물 역시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건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나비의 날아오름!
애벌레 기둥의 정상을 정복한 벌레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나비의 초대에 대해
나도 기꺼이 응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

 

다시, 꽃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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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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