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엘의 생일인 지난 토요일,
아빠와 만나서 맛있는 걸 먹기로 했던 다엘이
고열과 배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방학을 한 후 너무 심하게 놀았던 탓이다.
병명은 ’더위먹음’.

 

아무 데도 못 가고 끙끙 앓다가
좀 나아져서 친척들과 생일파티를 하기로 한 날,
이번엔 사촌누나가 비슷한 증상으로 아프면서
약속이 또 무산되었다.
상심한 다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소파에 누워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지인들에게
다엘의 생일 축하 메시지 전송을 부탁하기로 했다.
카톡방에 사연을 전하고 다엘의 폰 번호를 남겼더니
순식간에 따뜻한 메시지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다정한 편지 같은 축하문자와 함께
귀여운 아기 사진, 강아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급기야 아이스크림 쿠폰과
팥빙수 쿠폰 등 선물 메시지까지….

 

입이 귀에 걸린 다엘은 감사문자를 보낸 후
주소록에 이름들을 정성껏 저장했다.
그들 대부분이 다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나
아이의 다친 마음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엘과쌀국수.jpg » 생일축하 메시지에 단식(?)을 풀고 국수를 먹는 다엘

 

그들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운영진의 부당한 처사에 반기를 들었다가
강퇴, 즉 쫓겨난 전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한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더니
‘강퇴 이모’들이 다엘을 키운다는 말이 나와 웃으며 공감했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 중
온라인 카페의 회원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
초기의 순수했던 목적이 아닌 사심이 생기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일종의 권력이 형성되면서 아무 제한 없이 이를 행사하는 것이다.
최근에 식당이나 카페를 돌아다니며 공짜 서비스를 강요하는
지역 맘카페 운영진이 있다는 사실도 이런 현상의 한 단면일 것이다.

 

우리 모임도 첫 출발은
사회 편견을 없애고 아이들을 잘 키우자는 데서 비롯됐으나
다른 목적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돌아온 건 강제탈퇴와 활동정지였다.

 

그리하여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정의를 외치는 소수자가 양산됐다.
강퇴 이웃들과 나 자신을 위해 다짐을 한다.
현실적으로 지는 싸움에 들어섰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발자국 하나하나가 헛된 게 아니라고.
지금의 일상이 쌓여서 소중한 역사가 될 테니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고.

 

극히 일부만 누릴지도 모르는 잔칫상 앞에서
아픈 가시처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도록
마음 속 무쇠를 벼리자 생각한다.

 

한편으론 나 또한 그들처럼 욕망에 빠질 수 있는 약한 존재란 걸
상상해봤다.
만일 같은 시간에 와달라는 두 개의 초대장이 메일함에 도착했다면?
하나는 사회적으로 큰 명예를 주겠다는 초대의 글,
또 하나는 이름없는 소수자의 도움 요청 글,
둘 중 어느 메일을 먼저 열겠는가?
내가 좀더 큰 목소리를 낼 기회를 갖는다면
더 많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합리화와 함께
두 번째 메일은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삭제할지도 모른다.

 

작은 권력을 손에 쥐고 휘두르는 이들에게서
나 자신의 가장 나쁜 모습을 보는 거라 생각했다.

 

이와 함께
고인이 된 노회찬 의원의 삶을 마음 깊이 담는다.
큰 그림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사소함을 전혀 사소하지 않게 여겼던 사람.
참으로 영민하지만 소탈한 미소로 일관했던,
증오나 혐오를 앞세우지 않으면서 일침을 놓았던
그를 보내고
가슴 속이 휑하니 뚫려버렸다.

 

그의 영전에 내 아이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바친다.
‘나는 죽음이에요’라는 제목으로 북유럽 작가의 작품이다.
책 속에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소녀 이야기가 펼쳐진다.

 

‘숨이 멈추면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고요할까?
땅에 묻히게 될까? 재가 되면 산바람에 멀리 날아갈까?
아니면 하늘로 올라가게 될까? 다시 태어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궁금한가요? 내가 알려 줄게요.
나는 아무런 비밀도 숨기는 것도 없어요.’

 

이런 말과 함께 소녀의 답은 이어진다.
자신(죽음)이 찾아가지 않는다면
생명의 자리도 있을 수 없음을.
삶과 죽음은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에 함께 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 다엘이 꼽은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삶과 죽음이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가까운 곳에
늘 함께 있다고 하는 대목이다.

 

나는 죽음이에요1.jpg » 그림책 중 다엘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선함은 그토록 취약한 것인가.
악은 끝없이 번성하는가?”
누군가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아파하며 탄식했던 말이다.
내 아이의 사소한(?)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웃과 함께
저 아득한 질문에 답을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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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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