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닥속닥.jpg

 

밤 11시 반..
두 딸은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양파장아찌 두 병을 완성하고 부엌을 정리하고 나왔다.
끈적한 몸을 씻고 나오니 남편은 침대에 누워 있다.
저녁 나절 내내 제습기를 틀어 놓았던 안방은 뽀송하지만 후덥지근했다.
나는 불을 끄고 남편 옆에 누워 남편을 안으며 내 다리를 남편의 허벅다리위에 올렸다.
"더워"
남편이 나를 밀어낸다.
"사랑의 힘으로도 극복이 안돼?"
나는 살짝 삐져서 몸을 빼 냈다.

" 오늘 아침에 내가 녹색 봉사였잖아. 길 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아침부터 햇빛이 어찌나 뜨거운지, 거기는 그늘 한 점 없잖아. 게다가 녹색 조끼가 방수소재인지 나일론인지 바람이 하나도 안 통하는거야. 등에서 불이 나는 것 같더라.  여름엔 망사나 그물 소재로 만들어 주던지, 조끼말고 모자같은 거로 제작해서 쓰게 하던지, 아무리 봉사라고 해도 땡볕 아래 꼬박 40분을 그냥 서 있으려니까 너무 너무 덥고 힘들더라. 나중에 9시에 봉사 끝나자 마자 조끼를 벗었는데 세상에.. 그거만 벗어도 어찌나 시원한지... 내가 정말 열 받아서 조끼 벗어들고 교장실에 쳐 들어가서 당장 시원한 소재로 바꿔 달라고 항의 할 참에 마침 학부모 부회장 우진 엄마가 지나가더라고...달려가서 막 따졌지. 그랬더니 녹색회는 경찰서 소관이라네. 교통 경찰 나와 있을때 따져야 했는데..하여간에 대의원회에서 꼭 건의해달라고 부탁하고 집에 왔는데 힘이 쪽 빠지더라고..

빨래하고, 널고, 정리하고.. 하다보니 12시 반 금방 되지. 윤정이 공개수업에 간담회가 있다고 일찍
오라고 해서 부랴부랴 점심 먹고 달려갔지. 그 사이 이룸이 피아노 교실에 데려다주고 윤정이 반 공개 수업에 들어가서 같이 수업하고 3시 반까지 간담회 했는데, 보통 5학년 공개수업이나 간담회 하면 다른 학교들은 학부모들이 별로 안 오거든. 그런데 우리반은 열 일곱명이나 온 거야 학부모들이..선생님이 좋으니까, 애들이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니까 부모들 참여율도 좋아.

1학기 지낸 얘기 듣는데... 애들이 정말 좋은 교육을 받고 있더라고.
일단 선생님이 애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끝내주는거야.
말 끝마다 반 애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는게 느껴지니까 얼마나 좋아.
1학기 동안 다양한 시를 읽고 간단한 비평을 하는 활동을 했는데 수많은 시들 중에서 윤정이 반
아이들이 가장 좋다고 꼽은 시가 실향민 할아버지가 금강산 관광을 가서 산 너머에 있는 자기
고향땅을  바라보며 그곳에 갈 수 없는걸 슬퍼하는 그런 내용의 시 인거야.
애들이 이 시를 읽고 얘기하면서 막 울기도 하고 안타깝고 슬프다고 했대.
그래서 내가 물었지. 그 시를 읽은 것이 남북정상회담 전이냐, 후냐고.. 그랬더니 정상회담 후래.
아하... 싶었지. 우리도 남북정상회담 끝나고 애들이랑 북한 얘기 엄청 했잖아. 그런 감성이
정서가 이 아이들에게 아주 고스란한거야. 요즘 5학년인데 말야.

다음주에 연극 공연하는데 시나리오부터 소품까지 다 애들이 스스로 만들고 준비해서 올리는 연극이래. 처음엔 시나리오 쓰기 어려울것 같아서 선생님이 가방에 요즘 5학년을 상징하는 여러 물건들, 학원 문제집이나 스마트폰이나 만화책이나 교과서나 등등 그런 것을 넣고 가서 보여주며 애들의 고민을 들어보려고 했더니, 이 아이들이 고민이 별로 없는거야. 다들 너무 행복해서 딱히 힘들고 어려운 일들 이야기가 없더래. 사교육이나 학원같은데 많이 안 다니고 시달리는 일이 적으니까 고민도 별로 없어. 그래서 선생님이 그럼 이런 물건이 가방에 있는 아이는 어떤 고민이 있을까.. 이렇게 질문을 바꿔서 시나리오를 이끌어 내셨다고 하더라고..보통 5학년이면 공부 스트레스가 커지고 학원도 많이 다니는데 확실이 우리 학교 아이들은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고 편한가봐. 여전히 잘 놀고, 수업시간에도 엄청 시끄럽고 명랑하대.

학교 닭장에서 냄새 난다고 없애기로 학생 자치회에서 결정된 것을 바꾸려고 아이들끼리 발표문
적고 전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득 작전 펴고.. 이게 원래 계획된 게 아니라 우연히 드러난 사건을
아이들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려고 애쓴거야. 애들이 얼마나 많이 배웠겠어. 정말 대단하지.
윤정이한테 선생님 참 좋다고 얘기했더니 자기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서 최고 좋은 선생님이래.
1초도 고민없이 바로 얘기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룸이도 우리 선생님이 더 좋다고 막 우기고...
하하.. 얼마나 고마운지..

두 달 동안 교실에서 벌어진 경제 활동 프로젝트도 애들이 엄청 열심히 했나봐. '온세미로'라는 가상의 나라를 만들고 조폐공사에서 돈도 찍어내고, 세금도 걷고, 장사고 하고 그랬잖아. 직업을 두개, 세 개씩 가진 애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건물을 많이 가지고 건물 없는 애들한테 임대도
주고 그랬는데 임대료를 정할때도 돈 많이 벌수 있게 비싸게 안 하고, 빌리려는 애가 수입이 얼마인지, 세금은 얼마나 내고 있는지, 어느정도로 정해야 파산을 안 하는지 다 따져 가며 정하더래.

아직 어린 애들인데 생각들이 그 정도로 깊더래. 쉬는 시간에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애들이 딴 짓 할 틈이 없었대. 1학기 내내 아이들이 모둠끼리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쉬는 시간만 되면 조별 활동 하느라 싸우고 어쩌고 할 새고 없었다네. 애들이 정말 열심히 했대. 나중에 건의사항 말하라는데 건의할게 뭐가 있어. 애들이 이렇게 좋은 교육 받고 선생님이 사랑으로 최선을 다 하시는데... 그저 고맙다고 했지.7월 말에는 청양에 있는 청소년 수련관으로 1박 2일 여행간다고 애들이 너무 너무 들떠있어. 2학기에는 모둠별로 역사 유적 탐방이 있는데 학부모 한명이 도우미로 따라가지만
애들한테 어떤 말도 걸어선 안된대. 애들이 전철을 잘 못 타건, 엉뚱한 입구로 나오건 개입하면 안되고 그냥 같이 있어만 줘야 한대. 모든 것을 애들 스스로 부딪치며 해결하도록 말이야. 엄청 재미있겠더라. 전철 타고 샤갈전 전시회도 다녀오고, 음악회도 다녀올거래. 2학기에...애들이 정말 풍성한 배움을 하고 있구나.... 좋더라.

내가 이런 얘기를 종일 당신에게 하고 싶어서 꾹 참았다가 밤이나 되서 애들 잠 들고 당신 옆에 누워서 당신 살 비벼가며 이런 얘기 하는거지, 이런게 부부지 별거 있어? 애들 잘 큰다고, 오늘 학교에서 이런 이런 일 있었다고 남편 살 주물러가며 속닥속닥 하는 시간이 나는 제일 행복한데, 덥다니.... 참 할 말이 없네..."

남편은 어느새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서 나를 끌어안으며 내 발을 자기 다리 위로 끌어 올린다.

"내가 당신 살을 좋아하잖아.
문질문질 만지는 것도 좋아하고...
마누라니까 당신 뱃살 이뻐해주지..
아직 삼복도 아니고 밤엔 그닥 덥지도 않으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더 더워지면 남편이고 뭐고
다 뜨겁고 귀찮아서 손도 안 댈걸?
그러니까 마누라 귀찮아하면 안돼..
이리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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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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