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놀라운 발견·낯선 질문 이끄는 은유놀이

이안 2018.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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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jpg »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내일 이사할 집
이장근 

달력은 아파트야
2016아파트 7동 14호
오늘 이사한 집이야
어제 집은 정말 최악이었어
수학 시험을 봤고
30점을 맞았고
엄마는 귀신보다 무서운 얼굴로
말없이 나를 쳐다봤어
하루 한 번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난 그 집에서
살아서 나오기 힘들었을 거야
그래도 오늘은
내일 옆집이어서 다행이야
내일 이사할 15호는
내가 태어난 집이니까 

― <어린이와 문학>(2016년 9월호)

 
지금 나는 2018아파트 5동 9호에 산다. 같은 아파트인데도 7동과 8동은 정말 덥다. 12동, 1동, 2동은 춥고 눈이 많이 온다. 그때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눈사람을 불러내는 마술을 부리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3동, 4동에 살 때는 산수유 노랑부터 목련의 하양, 진달래 분홍까지 온갖 꽃들이 다투어 발길을 붙잡는 통에 지각한 날이 많았다. 5동에 오고 보니 4동에선 볼 수 없던 등꽃, 오동꽃, 이팝꽃, 찔레꽃, 아카시아꽃, 쥐똥나무꽃이 줄지어 핀다. 9동 옆엔 10동, 10동 옆엔 11동. 그 어느 동보다 과일이 많이 나와 오래 눌러앉고 싶지만, 같은 동에선 아무리 길어도 31일을 넘길 수 없다. 

그게 이 아파트의 법칙이다. 12동 31호에선 갓난아기부터 늙은이까지 누구도 예외 없이 이삿짐을 싼다. 서른세 번 이사 종이 울리면, 사람들은 한꺼번에 2019아파트 1동 1호에 도착한다. 나는 1966아파트 5동 1호에서 태어나 아파트를 52번 옮겼고, 동은 624번 옮겼으며, 1만8989번을 다른 호에서 살았다.

이 시의 첫 행, “달력은 아파트야”는 은유다. 시간(○○○○년 ○월 ○일)과 공간(××××아파트 ×동 ×호)의 단위적 유사성에 착안해 시간을 낯설게 공간화했다. 2018년 5월 9일은 별다르게 다가오지 않지만 2018아파트 5동 9호라고 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간의 건축물을 마주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모두 같은 시간의 집에 거주해온 동거인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은유는 이처럼 원관념(A, 달력)과 보조관념(B, 아파트)의 연결을 통해 우리를 놀라운 발견, 새로운 인식, 낯선 질문, 사유의 모험, 놀이의 정신으로 이끈다. 은유는 직유와 달리 원관념(A)과 보조관념(B)을 연결어(-처럼, -같이, -듯) 없이 연결한다. 보조관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비유의 참신함과 깊이가 달라진다. 

원관념을 ‘엄마’로 고정하고 보조관념을 생성해보자. 엄마는 별, 달, 어둠, 이슬, 세탁기, 조련사, 잠자리, 해바라기, 참새, 진다…. 질문과 답변이 없으면 은유는 태어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나타내기에 적합한 보조관념을 찾아보자. 울면, 냉면, 짜장면… 음식으로 나타내보자. 장미, 튤립, 채송화… 꽃으로 나타내보자. 비둘기, 참새, 모기… 동물로 나타내보자. 지다, 피다, 웃다… 동사로 나타내보자.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나는 정삼각형인지, 이등변삼각형인지, 직각이등변삼각형인지 도형으로 나타내보자.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가만히 앉아 보조관념 쪽으로 슬쩍 건너가보자. 원관념 A를 B, C, D, E, F…로 옮겨 사유함으로써 고정된 것처럼 보였던 세계는 유동하는 것으로, 풍부한 겹을 지닌 것으로 재탄생한다.

①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윤동주)
② 꼬리는 개의 말/ 개의 연필(유강희)
③ 나는 구름, 엄마는 우산(김륭)
④ 아무래도/ 노루는/ 혼자 5학년(송찬호)
⑤ 나는 엄마의 목도리(이장근)
⑥ 겨울밤이/ 두고 간/ 얼음 빗(김유진)
⑦ 나는/ 나팔 부는/ 나귀야(신민규)
⑧ 나는 너를 위해/ 가만히 열어 놓은/창문이야(안도현)
⑨ 모든 글씨는 지구 글씨체다(함민복)
⑩ 두루미 초청장(송선미)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는 독자가 채워 넣어야 할 괄호가 있다. ①, ②, ⑥, ⑧은 추가 문맥이 없더라도 해독이 수월한 반면, ③, ⑤, ⑦, ⑨, ⑩은 추가 문맥이 필요하다. ④는 텍스트 전체를 놓고 살펴보아도 의미가 모호하다. 노루가 혼자 5학년인 이유를 확정하기 어렵다. 괄호가 너무 넓으면 독자가 건너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어떤 시는 원관념을 제목으로 걸어놓고 보조관념의 나열만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음 시의 제목은 무엇일까? 

돌멩이
조그만 동그라미 벽돌
우리가 흘린 뿌스러기
등껍질
구슬
동그랑 풍선 

몇 해 전 어느 백일장 현장에서 유치원생이 쓴 이 작품을 읽고 몹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제목으로 어른 시인이 쓴 동시에 견주어 보아도 남다른 맛이 느껴졌다. 하나의 원관념에 여섯 개의 보조관념이 연결되자 원관념은 이전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의 겹을 껴입은 존재로 재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흘린 뿌스러기”처럼 하찮아 보이기도 하지만 “돌멩이”와 “조그만 동그라미 벽돌” 같은 단단함을 지닌 “등껍질”, 영롱한 “구슬” 같으나 쉽게 터지기도 하는 “동그랑 풍선” 같은 이것은 무엇인가. 답은 ‘달팽이’이다. 달팽이가 “우리가 흘린 뿌스러기”라니, “동그랑 풍선”이라니, “구슬”이자 “조그만 동그라미 벽돌”이라니, 그리고 이 모든 것일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말싸움
유강희

니 똥꼬
염소 똥꼬 

만날 까만 콩자반만 좋아해 

니 똥꼬
오리 똥꼬 

니 학교 갈 때 궁뎅이 띠똥뙤똥 

―〈오리 발에 불났다〉(문학동네 2010) 


원관념(1, 3연 1행)과 보조관념(1, 3연 2행)의 연결, 그 이유(2, 4연)로 짜인 작품이다. 1-2연의 공격에 맞선 3-4연의 반격이 만만찮다. 말싸움이지만 말놀이와 관찰이 바탕을 이룬다. 랩 배틀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서로를 사람이 아닌 염소와 오리로 밀쳐내는 데서 놀림이 발생하고 응전하고픈 식식거림이 솟아난다. 2, 4연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를 효과적으로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글씨체
함민복 

달리는 버스에서 쓴
글씨가 삐뚤빼뚤 

낯선 이 글씨는
누구의 글씨체일까 

버스체다
굽은 길체다 

움직이는 지구에서 쓴
모든 글씨는 지구 글씨체다 

―〈동시마중〉(2017년 1·2월호)


 “모든 글씨는” 앞에 “지구에서 쓴”, 그 앞에 다시 “움직이는”이라는 수식이 놓여 있다. 1연 1행이→확인(1연 2행)→질문(2연)→답변(3연) 과정을 거쳐 마침내 4연의 매우 깊은 은유에 도달한다. “움직이는”→“지구에서 쓴”→“모든 글씨는 지구 글씨체다”라니, 우리 모두가 ‘지구버스’의 동승자임을 알겠다. 나의 못남이 나의 못남만 아니고, 나의 잘남이 나의 잘남만 아닌 것을 두루 수긍하게 된다. 미웠던 당신의 그때에 당신이 굽은 길을 돌고 있었음을 뒤늦게 살피게 되었다. 이 짧은 시행의 전개에서 이렇듯 새로운 사유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데 무겁지 않다. 이 무게는 농담의 무거움일까, 진담의 가벼움일까. 

이장근 시인은 시와 동시, 청소년시를 함께 쓴다. 지금까지 시집 한 권, 청소년시집 세 권, 동시집 두 권을 냈다. 두 번째 동시집 〈칠판 볶음밥〉(창비 2015)에서 한 편 더 소개한다. 올해의 첫 타임머신은 언제 내릴까? 아마 12동 15호는 지난 뒤가 될 것 같다.
타임머신아, 녹지 마
이장근 

타임머신이 내린다
타임머신이 쌓인다
타임머신에 손이 닿는 순간
펑! 아빠가 작아진다
초등학생이 되어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넘어지고
뒹굴고
웃고
떠들고
나랑 어깨동무한다 

그러니까 타임머신아, 녹지 마


이안 시인, <동시마중> 편집위원 anin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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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시집 두 권 내고 나서 동시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20년 가까이 동시를 껴안고 사는 동안, 시 앞에 붙은 '동'이 사랑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언제나 어린이=시인의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며, 쓰고자 한다.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http://cafe.daum.net/iansi)을 만드는 편집자, 동시 전문 팟캐스트_이안의 동시 이야기(http://www.podbbang.com/ch/8204)를 진행하고, 찾는 곳 어디든 동시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동시 전달자. 그리고 무엇보다 동시의 시대를 활짝 꽃피우고 싶은 사람이다. 1999년 등단하여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고양이의 탄생> <글자동물원>, 동시 평론집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를 냈다.
이메일 : anin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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