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jpg ,


결혼 할 때 내가 혼수로 사들고 온 가전제품들은 정말 단출했다.

냉장고와 세탁기, 텔레비젼과 오디오 정도였다.  그 외는 신랑이 총각때 쓰던 것으로

충분했다. 직장에 다니는 두 사람이 살기에 그 정도의 가전제품도 많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가전제품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소박하고 건강한 삶을 살겠다던 처녀적의 내 결심이 무색하게도 결혼 16년차에

들어선 지금의 나는 수많은 가전제품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청소기만 해도 유선과 무선, 두 대가 넘고 토스터기에 전기 포트, 선풍기는

식구 수 대로 있다. 사 놓고 쓰지도 않는 공기 청정기며 가습기며 제습기도

두 대나 있고, 오븐에 취사도 전기 레인지를 쓰고 있는데다 컴퓨터도 세 개나 되고

여러대의 멀티탭에는 디지털 기기의 충전을 위한 코드들이 늘 여러개씩 연결되어 있다.

가히 전기에 의존해서, 전기에 중독되어 살고 있는 삶이라 하겠다.

그런 내게 '이나가키 에미코'가 쓴 '그래도 생할은 계속된다'라는 책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녀가 전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수화물을 끊거나, 술, 담배를 끊거나, 고기를 끊는 결심을 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 하나 하나도 실천하기까지 지난한 과정들을 거쳐야 하고 계속

지켜가며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인데 저자는 무려 '전기'를 끊고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실천한다. 고기도 아니고, 담배나 술 도 아닌 '전기'를 말이다.

어째서 이런 무모하고 황당한 결심을 하게 된 걸까.

그게 가능이나 한가.


그녀의 시작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사건이었다.

동일본을 강타한 대진진이 일으킨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해서 무너져 내리는 영상은 전 지구인들을 충격속에 빠뜨렸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던 내가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내가 아무런 의심없이 단단하다고 믿고 있던 일상의 기반이

원자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전기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기반은

절대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많은 것들이 흔들려 버렸다.

저자 역시 그랬다.

전기에 젖어 편리하고 안락한 삶에 취해서 사느라 쉼없이 이어지는 원자력

사고가 주는 경고를 무시해왔던 자신 역시 사고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개인 차원의 탈원전 계획'을 세우게 된다.

원자력 발전에 의지하지 않는 삶이 가능한지 도전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전기를 아껴쓰는 것으로 시작했다. 전기 소모가 큰 가전제품도 하나 둘씩

처분했다. 세탁기를 없애고 손빨래를 하고, 청소기 대신 빗자루를 들여 놓았다.

오븐이나 전자레인지를 없애고, 믹서같은 주방 가전들도 치웠다.

이것 없이도 살 수 있을까.. 반신반의 하던 것들을 하나 둘씩 치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한가지씩 없앨 때마다 오히려 자유로와 졌다.

기계를 다루고, 관리하는 일이 주던 피곤함이 컸던 것이다.

전기 난방도 포기하고, 전기 온수도 단념한 그녀도 냉장고를 없앨때는

저항이 컸다고 고백한다. 냉장고 없이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대형마트며 시장을 돌아 사들이는 각종 식재료들은 냉장실과

냉동고를 꽉 채우고 있다. 딱히 살 생각이 없었지만 세일을 하거나 끼워파는

것들을 만나면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사들여 왔던

그녀였다.


사실 현대인들 대부분이 이렇게 산다. 우리의 냉장고에는 당장 먹지는 않지만

언젠가 해 먹을 생각으로 사 놓고 얼려둔 식재료들이 차고 넘친다.

이렇게 과잉으로 사들인 음식들은 절반 이상 버려진다. 너무 오래 저장되어 찜찜하거나,

사 놓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나중에 발견해서 버리게 되거나

그냥 귀찮아서 미루어 두었다가 상하거나, 너무 많이 해서 먹고 남는 음식들을

우린 쉽게 버린다. 그리고 또 사들인다.

냉장고는 점점 커지고, 냉동고도 따로 들여놓고 모두 식재료가 그득하지만

음식 만들기는 매번 귀찮고, 막상 냉장고를 열면 뭘 먹을지 막막하고

다시 새로운 식재료로 눈을 돌리거나 나가서 사 먹는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가능성을 쌓아두느라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삶, 자본도 낭비하고 건강도 잃고 있는

우리의 삶이 놓치고 있는 것을 냉장고를 없앤 그녀의 삶은 또렷하게 보여준다.


냉장고가 없는 그녀의 식생활은 극히 소박하다.

가스 버너에 밥을 짓고, 끓는 물에 햇볕에 말린 야채들조각과 된장가루를 풀어 만든

된장국에 채소 절임이 주식이다. 가끔 더 푸짐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을땐

나가서 사 먹는다.

전기 난방을 끊고 탕파에 뜨거운 물을 채워 이불속에 넣고 겨울을 견디며

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더위를 견딘다.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 집에서

씻는 것은 최소한 간단하게 하고 며칠에 한번씩 대중탕에 가서 목욕을 해결한다.


전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란 곧 소유와 소비로부터 멀어지는 삶과 이어진다.

세탁기로 세탁하고 건조기로 빨래를 말릴때는 하루에도 몇 벌씩 옷을 갈아입고

내 놓는 것에 무심해진다. 그러나 손빨래를 하게 된 다음부터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옷만 지니게 되고, 식재료 역시 바로 해 먹을 수 있는 것들에 국한된다.

청소기를 없애고 나면 자신의 힘으로 청소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살기에

적당한 곳임을 깨닫게 된다. 더운물이 귀해지면 아무때나 물을 콸콸 틀어 놓고

샤워를 즐기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기분내키는 대로 습관적으로 물건을 사들이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불 속에 넣고 잔 뜨거운 물이 미지근해진 겨울 아침, 그녀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햇살이다. 마침내 해가 떠오르고 그녀의 방을 비출때 그녀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얼마나 따스한지 절절하게 느끼며 감동한다.


전기를 끊고 그녀가 얻은 것은 놀랍도록 생생한 감각들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바로 해서 먹는 음식들이 주는 건강한 맛, 겨울 아침에 맞이하는

햇살의 따스함, 한 여름 나무 그늘 속에서 희미하게 지나가는 실낱같은 바람도

그녀는 올올이 느끼게 되었다. 늘 난방과 냉방이 주는 인공적인 온도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오래전에 잊고 있던 그런 감각들말이다.


물론 그녀의 실천들은 너무나 급진적이라 쉽게 따라하기 어렵다.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은 그녀가 비혼에 혼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이정도까지 전기를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별나고 특이한 사람의 기행, 그 이상의

울림이 있다. 무엇보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전기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지, 그런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위에 서 있는지 보게 해 준다.

전기가 주는 편리함에 취한 현대인들은 불필요하게 많이 사들이고, 저장하는 일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쓰며 지쳐간다.

집을 늘이고, 더 큰 냉장고를 사고, 세탁기 옆에 최신 건조기를 들여놓고

스타일러로 옷을 살균하느라 돈은 나날이 더 들어가고 우리가 관리해야 하는

기계들이 늘어갈수록 생활이 편리해지기는 커녕 삶은 더 피곤해진다.


자본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 나오는 가전제품을 더 많이 사들이라고 부추긴다.

마치 전기가 언제까지나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마법의 연료인양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태는 전기에 취해 사는 우리의 문명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위험은 계속 커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탈핵을 지지한다.  원자력 발전을 줄이거나 멈추고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에 찬성한다. 그러나 내 일상에서 이토록 전기에 의존하는

삶을 누리면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인가.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일상에서 전기에 의존하는 것을 줄여나갈 수 있어야 한다.

전기에 취해 사는 동안 둔해지고 잊혀지고 있었던 삶에 대한 감각을 찾아 나가야 한다.


먼저 냉장고를 그득 채우고 있는 식재료들을 차례 차례 비우는 것부터 시작하려 한다.

전기 코드를 쉽게 꽂기 전에 조금 더 부지런하게 내 몸을 움직여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늘여가면서 말이다.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31776018/4f9/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2055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imagefile [2] 홍창욱 2018-03-18 1318
2054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뿌린 대로 거두리라 imagefile [3] 정은주 2018-03-16 2402
»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전기없이 살 수 있을까? imagefile [2] 신순화 2018-03-16 2317
2052 [강남구의 아이 마음속으로] 목욕탕에도 계급장 있는 경찰청 imagefile 강남구 2018-03-16 6675
2051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표선해수욕장에서 연날리기 imagefile 홍창욱 2018-03-12 1774
2050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 [아이책] 엄마가 보고플 때 imagefile [2] 서이슬 2018-03-12 1799
2049 [강남구의 아이 마음속으로] 안희정은 집안일을 했을까?...권력자와 가정주부 imagefile [4] 강남구 2018-03-08 4314
2048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아이와 함께 한 1박 2일 제주여행 imagefile [2] 홍창욱 2018-03-08 1130
2047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들, 또 한 계단을 오르다 imagefile [7] 신순화 2018-03-07 2909
2046 [박진현의 평등 육아 일기] 장래희망? 내가 어떻게 알아! imagefile [3] 박진현 2018-03-06 2248
2045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선생님이라는 큰 선물 image [3] 정은주 2018-03-04 850
2044 [일본 아줌마의 아날로그 육아] 수험생이 있는 가정의 새해 다짐 imagefile [5] 윤영희 2018-03-01 2267
2043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 [어른책] 아이를 품는 헌법 imagefile [2] 서이슬 2018-03-01 3088
2042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품 떠나는 아들, 이젠 때가 왔다 imagefile [9] 신순화 2018-02-25 2829
2041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명절 대이동 보다 힘들었던 놀이기구 타기 imagefile [2] 홍창욱 2018-02-24 806
2040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35년 만의 미투 (me too) imagefile [12] 신순화 2018-02-21 3961
2039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 [어른책] 매일 먹는 놀이밥 imagefile [8] 서이슬 2018-02-20 2995
2038 [뽀뇨아빠의 저녁이 있는 삶] 아내와 빵 터진 둘째어록 imagefile [2] 홍창욱 2018-02-20 2995
2037 [정은주의 가슴으로 키우는 아이] 그래도 아이는 자란다 imagefile [8] 정은주 2018-02-19 1615
2036 [최형주의 빛나는 지금] 야 이거 어떡해! 너무 맛있어! imagefile [4] 최형주 2018-02-19 845

Q.22개월 남아: 자꾸 타인 눈을 찌르거나 손으로 ...

안녕하세요. 지도와 훈육도 중요하지만 전문의가 조언을 통해 아이 심리를 파악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이설명:-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