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노동이 배어 있는 그 냄새, 그래서 더 서러운

이안 2018. 02. 14
조회수 593 추천수 0
이안1.jpg »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손톱 밑에서
임복순 

나물 다듬은 날은
까만 손톱 밑에서
풀 냄새가 난다. 

김치 담근 날은
빨개진 손톱 밑에서
고춧가루 마늘 냄새가 나고 

식구들 귤 까 주느라
노랗게 물든 손톱 밑에선
귤 냄새가 난다. 

엄마 냄새는
손톱 밑에서 산다.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창비 2016)


엄마라는 말에서는 어떤 냄새가 맡아질까. 아빠는 또 어떨까.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떤 냄새로 기억될까. 아이에게 물어 보자. 이다음에 엄마가 되면, 아빠가 되면, 어떤 냄새로 기억되고 싶니? 요즘 엄마 냄새는 어때? 엄마 냄새 중에서 어떤 게 제일 좋아? 오늘은 잊히지 않는 좋은 냄새를 아이에게 듬뿍 묻혀 주고 싶다.  

임복순의 ‘손톱 밑에서’는 예전의 우리네 엄마 냄새를 물씬 풍긴다. 식구들을 위해 나물을 다듬고, 김치를 담그고, 귤을 까 주느라 엄마 냄새는 까매지고 빨개지고 노랗게 물든 채 손톱 밑에서 살았다. 엄마 냄새가 하나같이 음식과 관계되어 기록된 건 식구들을 먹이고 돌보고 기르는 여성-엄마라는 사람이 집집마다 대부분 실재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나물을 다듬는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김치를 담그는 엄마도 드물다. 그럴 시간도 없으려니와 좋은 엄마상, 여성상이 바뀐 지도 오래되었다.  

손톱이 손의 최전선이라면 손톱 밑은 손의 오지-변두리다. 손톱 밑에는 그가 감당한 노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엄마 냄새는/ 손톱 밑에서 산다”는 말은 오랜 세월 억압된 여성-엄마의 사회적 지위를 환기하기에 한층 더 서럽다. 여성-엄마의 노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보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발표 당시(〈시와소금〉 2015년 봄호)엔 각 연의 서술어가 “났다”-“났고”-“났다”-“살았다”의 과거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시집에 실리면서 현재형으로 바뀌었다. 어미 ‘-았-’은,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볼 때 완료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거나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나타낸다. 반면, ‘ㄴ다’는 ‘현재 사건이나 사실을 서술’한다. 시적 울림과 여운을 보유하고 환기하는 힘이 ‘과거-현재’에서 ‘현재’로 바뀌었다. 작은 것 같지만 큰 차이다.  

견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견딜 수밖에 없는, 견딜 길밖에 없는 때가 찾아 온 적이 있다. 주변에서 전해 준 위로의 말이 적잖은 힘이 되었다. 위로를 준 말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 보니 그렇더라고 덤덤히 하는 자기 얘기였다. 가령 다음 같은 말은, 겪지 않은 이라면 하기 어렵다. 

숙제
김금래
 
꽃은
진딧물이랑 살아라 

배추는
배추벌레랑 살아라 

소나무는 
송충이랑 살아라 

바위는
이끼랑 살아라 

잘 살아라 

―〈꽃피는 보푸라기〉(한겨레아이들 2016)


악담은 남을 비방하거나 남이 잘못되도록 저주하는 말이다.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반면, 쓴소리는 당장 듣기에는 거슬리지만 제대로 받아들이면 성장에 도움이 된다. 쓴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 갇혀 버린다. 썩기 쉽고, 맑음을 이어갈 수 없다. 입이 도끼날 같은 쓴소리는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힘이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를 윤리적으로 만든다. 

꽃에게 진딧물이 달가울 리 없고, 배추에게 배추벌레가 득이 될 리 없다. 소나무에게 송충이는 한갓 해충일 뿐이다. 그런데도 적이라고 내치지 않는다. 적이 달라붙어 있으니 정신을 더 바짝 차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적에게 줄 것까지 셈하여 자신을 더 부지런히 살찌우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꽃망울은 늘 한 떼의 진딧물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그랬다. 진딧물 없이 피는 꽃은 가짜라는 듯, 꽃은 항상 진딧물과 함께 피었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다면 적과 잘 살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 행 “잘 살아라”의 “잘”은 유난히 간곡하게, 간곡한 당부처럼 읽힌다. 적과 잘 살기가 그만큼 어려워서이겠다. 

모탕
방주현 

도끼가 날아올 때마다
질끈
눈을 감았지 

저에게 오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언제나
꽉!
눈을 감았지


―〈동시마중〉(2016년 7·8월호)


‘모탕’은 ‘버팀목’이나 ‘버팀돌’처럼 이름만으로 그 쓰임이 떠오르는 말은 아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보면, “「1」 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에 받쳐 놓는 나무토막. 「2」 곡식이나 물건을 땅바닥에 놓거나 쌓을 때 밑에 괴는 나무토막.”으로 나와 있다. 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인 ‘모루’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잠깐 떠올려 본다. 자주, 요긴하게 쓰이다 보면 머잖아 그에 걸맞은 이름이 붙는다. 마찬가지로 쓰임이 사라지면 이름도 잊힌다. 어릴 적 자주 보았으면서도 정작 그 이름을 모르고 지내다가 얼마 전 이 시를 읽고서야 퍼즐 하나가 딸깍 맞추어지는 느낌이었다. 뒤뜰 장작가리 앞에 놓인 모탕은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다.  

이 작품은 “저에게 오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언제나/ 꽉!/ 눈을 감”아 온 반복적인 회피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는 것 같지만, 실은 여기서 눈을 감는 행위는 사태의 회피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수락이고 견딤이다. 날을 세우고 집요하게 덤벼드는 운명의 공격에 통나무는 도끼날을 몇 번 튕겨 내거나 차라리 깊숙이 받아 안고 쪼개지면 그뿐이지만 모탕은 그렇지 않다. 통나무는 도끼날이 잘 먹게 모탕 위에 세로로 놓인다. 모탕은 최대한 오래 견디도록 가로로 놓인다. 충격이 통나무보다 훨씬 더 크고 깊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모탕은 자기에게 오는 것이 아니지만 결국은 자기에게 이르는(분리되었으나 분리되지 않은) 운명의 공격과 하중을 “눈을 감”고 받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모탕이라는 말에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공격을 받아 안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하나의 정신과 육체가 떠오른다.  

임복순 시인은 2011년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아이들의 생활과 심리를 반영한 따뜻한 동시를 쓰는 시인이다. 2016년에 나온 첫 동시집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에는 ‘나비를 알았다’, ‘콩반장’, ‘나만 보았지’, ‘소중한 곳’, ‘월요일 모자’ 같은 교실 동시뿐 아니라 ‘배흘림기둥’, ‘요즘 부채’,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 ‘자석이 달린 글자’ 등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작품이 많이 실렸다. 초등 3~4학년부터 읽기에 알맞다. 위로의 시간에 접속할 만한 작품 한 편 더 소개한다.  

그만하면
임복순


자전거 타고 멀리 갔다 오다
저녁 먹고 집에 가기로 했다.
순두부찌개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벽에 붙은 글을 가만히 보다가
‘ㄹ’ 받침을 넣어 읽어 버렸다.

조금만 덜 노력하세요.
조금만 덜 성실하세요.
조금만 덜 인내하세요. 

숟가락 놓던 아빠가 푸핫 웃었다.
“그래, 너 그만하면 괜찮아.
지금도 꽤 괜찮아.”
“응, 아빠도 그만하면 괜찮아.
지금도 꽤 괜찮아.”
 
서로 꽤 괜찮다고 치켜세우는 동안
막 식탁에 올라온 순두부찌개가
자기도 이만하면 괜찮을 거라고
냄새 피우며 끼어들었다. 

뭐, 순두부찌개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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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시집 두 권 내고 나서 동시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20년 가까이 동시를 껴안고 사는 동안, 시 앞에 붙은 '동'이 사랑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언제나 어린이=시인의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며, 쓰고자 한다.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http://cafe.daum.net/iansi)을 만드는 편집자, 동시 전문 팟캐스트_이안의 동시 이야기(http://www.podbbang.com/ch/8204)를 진행하고, 찾는 곳 어디든 동시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동시 전달자. 그리고 무엇보다 동시의 시대를 활짝 꽃피우고 싶은 사람이다. 1999년 등단하여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고양이의 탄생> <글자동물원>, 동시 평론집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를 냈다.
이메일 : anin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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