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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없는 영어수업 금지, 꼬리만 잘라내는 미봉책

양선아 2018. 01. 31
조회수 1789 추천수 0
엄마들이 본 영어교육 논란

3.jpg »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영어교육박람회에서 한 어린이가 영어 교재를 둘러보고 있다. 영어 교과 과정에 대한 불신이 짙은 가운데, 부모들은 각자도생식으로 아이에게 영어 교육을 하고 있다.윤운식 기자
교육부가 올해 3월부터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영어 수업을 금지한 데 이어, 유치원 방과후 영어 수업을 금지하려다 강한 역풍을 맞았다. 결국, 유치원의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 정책은 1년 유예됐다. 교육부는 또 지난 29일 올해부터 국민에게 파급력이 큰 정책을 추진할 때 ‘국민참여 숙려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논란 과정에서 많은 언론은 부모들이 방과후 영어 수업에 만족하는데 이를 금지한다고 하니 사교육을 하라는 말이냐며 반발한 것이라고 전했다. 또 고액의 영어 사교육은 금지하지 못하면서 저렴하고 양질의 방과후 수업만 규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고도 전했다. 상당수 부모의 여론이 그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논란 과정에서 부모들이 정책 당국에 하고 싶은 말은 이것 이상으로 더 많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무시한 채 무작정 유아 시기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안도감이 드는 현실과 사회적 맥락이 있다. 부모들은 ‘대한민국 영어 교육’과 ‘입시 제도’, 그리고 ‘돌봄 정책’에 할 말이 많다.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겠다고 밝힌 만큼, 여러 부모의 공교육 내 영어 교육에 대한 솔직한 의견과 이번 정책 추진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영어 교과 과정별 단절이 너무 심합니다. 학교에서 수업과 평가의 괴리가 너무 커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초등 영어는 다들 쉽거나 재미있다고 말해요. 그런데 중학교 가면 갑자기 딱딱해지고 난이도도 확 올라가요. 평가는 어떤 줄 아세요?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는데, 갑자기 영어로 글을 쓰고 발표를 하라고 해요. 변별력을 위해서요.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어요. 유아나 초등학생을 키우는 부모도 이런 현실을 선배 부모에게 전해 듣고 다 압니다. 사교육 업체들은 또 얼마나 불안감을 조성합니까? 불안한 부모는 조금이라도 빨리 아이에게 영어를 노출하면 아이가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는 거죠.”
 
4.jpg » 어린이들이 영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만 3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이자 경기도 안양시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이영주(43)씨의 말이다. 이씨는 학원에서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많은 학생을 관찰한 결과, 그는 일찍부터 영어를 시작한다고 반드시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다. 영어도 결국 언어이므로 문해력이 중요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일찍 영어에 노출하기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동기나 독서를 통한 다양한 배경 지식과 사고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씨는 유치원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 정책이 틀린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씨가 교육부의 이번 정책 발표에 화가 나고 반대했던 이유는, 정부가 근본적으로 현재 학교 교육의 문제점이나 영어 교과 과정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어떠한 청사진도 없이, 단순하게 유치원의 영어 방과후 수업 규제책만 내놨기 때문이다. 마치 도마뱀을 잡아야 하는데 몸통은 잡지 않고 꼬리만 잡아 자르는 식의 느낌을 부모들이 받은 셈이다. 이씨는 “이번 기회에 공교육에서의 영어 교육 목표가 무엇인지 점검하고, 수업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학교 평가 시스템이나 지나치게 어려운 입시 문제에 대한 개선 방안이 함께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수의 전문가가 조기 영어 교육의 효과가 크지 않다고 말하는데도, 부모들이 왜 유아 시기부터 영어에 노출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원인을 살펴 그 불안감을 없애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을 키우고 있는 30~40대 부모 세대는 성장 과정에서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겪은 세대다. 국·영·수 위주의 평가 시스템에서 영어는 주요한 평가 기준이었고, 취업할 때도 토익 점수 등을 기본적으로 제출했다. 대학 시절에는 배낭여행 바람이 불어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외국인을 만나면 쑥스럽고, 실제 업무에서 영어가 필요해도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자녀만은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고 싶어 한다. 또 문법 위주의 영어 교육이 아니라 놀이 식으로 즐겁게 영어를 배우길 바라고, 영어에 대한 노출의 양도 늘리고 싶어 한다. 

9살 아들을 키우는 김문화(40)씨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이뤄지는 영어 수업은 일주일에 2~3번 30분 정도 즐겁게 노래 부르고 게임을 하면서 노는 식”이라며 “가랑비에 옷 젖듯 자연스럽게 영어에 대한 노출의 빈도를 높이는 일인데 아이에게 어떤 점에서 부정적이라는 건지 설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는 외국어의 교육 적기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 시기가 적기인지 부모들의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더 뚜렷한 근거 제시를 하고, 유아 시기 및 초등 1~2학년 시기에 영어 교육이 아닌 다른 어떤 교육이 좋은지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성도 있다.
 
6.jpg » 한 대형 대학입시 전문 학원이 지난해 7월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연 ‘2018 대입 수시지원전략 설명회’를 찾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자료를 살펴보며 입시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자주 바뀌는 입시 정책으로 인해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큰데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도 약하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잦은 입시 제도 개편과 정책 번복 등으로 정부 교육 정책에 대한 누적된 불신이 이번 정책 발표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는 목소리도 있다. 6살, 3살 두 아이를 키우며 부모들이 조직한 비영리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조성실(31)씨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영어는 권력이다. 영어를 잘해야 입시와 취업에서 유리하다. 그런 상황에서 교육부가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수업을 금지했으니 유아 시기도 당연히 금지한다고 기계론적으로만 적용해 부모들의 분노를 키웠다”고 평가했다. 

조씨는 “학내에서 과열 경쟁은 여전하고, 성적으로 줄 세우고 평가하는 방식은 변함없다”며 “부모와 아이들이 느끼는 지옥 같은 현실을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 제도가 바뀌면서 부모와 아이가 느끼는 혼선이 크며, 정부가 제시한 방향대로 적기 교육을 했다간 손해 볼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부모들은 각자도생식 교육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유치원과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 영어 수업은 영어 교육 기능 외에도 돌봄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영어 방과후 수업을 금지하면 보육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또 초등 돌봄교실의 질은 어떻게 올릴 것인지에 대한 대안 제시도 없이 이번 정책을 발표해 부모들의 불안감만 더 가중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사교육 시장은 갈수록 팽창하고 있고, 공교육에 대한 불신은 팽배해요. 교육 정책 입안자들이 최소한 20년은 내다보고 유아 시기부터 초중고 시기에 어떤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지 제대로 설계를 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문제를 푸는 기계가 됐고, 학교에서는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모르는 게 죄가 아닌데, 학교에서 모르면 죄인이고 부진아 대접만 받아요. 영어 교육 열풍이 불면서 모국어 해독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늘고 아이마다 격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그런 현실에 대한 파악도 없이 단선적인 대책 발표만 하니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학부모이자 보육교사였던 김호연씨는 놀이 중심의 유아 교육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이들이 놓인 현실 진단을 바탕으로 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부모들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정책,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있는 대책들을 바란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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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한겨레신문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현재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쓰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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