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취미가 직업이 되면 그때 가서 우기자

김민식 2018. 01. 02
조회수 2290 추천수 0
어려서부터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한 제가 공대를 간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제 글씨가 알아보기 힘든 악필인데요. 아버지께서는 ‘그 필체로 문과에 갔다가는 굶어 죽기 딱 좋다’고 하셨어요. 교사로 평생 일한 아버지는 “선생이 아무리 잘 가르쳐도 강의 교안 글씨가 엉망이면 교장에게 인정받기 힘들어”라고 하셨지요. 1970~80년대 직장에서는 손글씨로 문서를 작성했기에 좋은 필체가 승진의 열쇠라고 하셨어요.

중학생 시절에는 서예학원의 펜글씨 반까지 다녔지만 끝내 글씨는 교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문과를 포기하고 이과를 갔는데요. 대학에서 석탄채굴학과 석유시추공학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어요. 살아보니 필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이 스물에 내가 불행한 건 아버지 탓인데, 나이 마흔에도 불행하다면 그것도 아버지 탓일까? 인생을 바꾸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그때부터 전공 공부는 포기하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게 영어소설 읽기였고 미국 시트콤 시청이었어요. 통역대학원을 나와 피디가 되고 끝내는 작가라는 어릴 적 꿈을 이루었는데요. 아버지의 진로 지도 덕분이 아니라 저 자신의 즐거움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여전히 글씨체는 엉망이지만 책이나 칼럼을 쓰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서가 나오면서 손글씨를 대체했거든요. 정보화기기의 발달로 미래에 일자리가 줄어들까 걱정하는 분도 있는데요, 사라지는 일이 있다면 새로 생기는 일도 있을 겁니다. 남자에 비해 육체적 근력이 달리는 여성들에게 일자리가 늘어난 건 분명 기계와 로봇의 발달 덕분이거든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활약할 미래에 어떤 변화가 올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모든 정보를 휴대폰에서 찾을 수 있는 시대에 지식을 무조건 암기하는 게 옳을까? 영어 자동 통역기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돈과 시간을 들여 영어 조기 교육을 하는 게 옳을까?  답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답을 모를 때 저는 그냥 그 순간 즐거운 일을 합니다.

새해가 되면 영어를 공부하고 운동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지요. 저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냥 매일 아침 일어나 그날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가장 열심히 하며 삽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되고 그러면 취미가 직업으로 전환되기도 하거든요. 그럼 그때 가서 우기려고요. 처음부터 그게 목표였다고.
 
김민식.jpg » 김민식 피디의 두 딸이 몽고 테렐지 국립공원에서 보드게임을 하며 즐겁게 놀고 있다. 김 피디는 아이들에게 항상 지금 즐거운 일을 하라고 강조한다. 아이들은 아빠와 여행하면서 독서와 보드게임을 함께 즐긴다. 사진 김민식.
아이들이 어떤 세상을 살아갈지 알 수 없을 때, 저는 아이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주고 싶습니다.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기고 언젠가 꿈을 이룬다면 그때 가서 우기려고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 이게 원래 아빠의 육아 목표였다니까!”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김민식
SF 애호가 겸 번역가, 시트콤 덕후 겸 연출가, 드라마 매니아 겸 감독, 현재는 책벌레 겸 작가. 놀이를 직업으로 만드는 사람. 아이들의 미래도 놀이에 있다고 믿는 날라리 아빠.
이메일 : seinfeld68@gmail.com      

최신글




  • 아이와 함께, 그보다 더 바라면 협박아이와 함께, 그보다 더 바라면 협박

    김민식 | 2017. 12. 06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교사들을 상대로 강연하는 자리에 가면 이렇게 물어본답니다.“그래서 여러분은 유괴범입니까 선생님입니까?” 부모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면 유괴범이고,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좋아서 열심히 했는데 그 대가로 나라에서 ...

  • 아이에게 필요한 건 지시 아닌 질문아이에게 필요한 건 지시 아닌 질문

    김민식 | 2017. 11. 08

    김민식 피디의 통째로 육아  공대를 나와 영업사원을 하다 드라마 피디로 일하는 저를 보고 친구들이 가끔 묻습니다. “너는 연출을 전공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드라마를 만드니?”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모른다.” 저는 드라마를 모...

  • ‘승자 독식’ 전교 일등들의 편식‘승자 독식’ 전교 일등들의 편식

    김민식 | 2017. 10. 11

    선수 기류 요시히데가 100m 단거리 경주에서 9초98의 기록을 세우며 순수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마의 10초’ 벽을 깼습니다. 2016 리우올림픽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은 육상 400m 남자 계주에서 일본이 은메달을 땄을 때입니다. 육상은 신체 조건상 ...

  • 방송사 피디 집에 TV가 없는 까닭방송사 피디 집에 TV가 없는 까닭

    김민식 | 2017. 09. 05

    방송사 피디로 20년을 살며 다양한 직업인을 만났는데요. 가장 부러운 직업이 작가입니다. 대중에게 얼굴을 알려야 하는 연예인에 비해 사생활이 보장되고요. 직업 수명이 길어 나이 70살에도 드라마를 집필하기도 합니다.저의 꿈은 퇴직 후 전업 작...

  • 육아엔 ‘대기 발령’이 없다육아엔 ‘대기 발령’이 없다

    김민식 | 2017. 08. 09

    문화방송(MBC)에서 드라마 피디로 일하는 저는 “김장겸은 물러나라”고 외쳤다가 한 달간 자택 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대기 발령 기간 동안 일하는 아내 대신 아이들을 돌보았는데요. 한 달 동안 육아의 어려움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일단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