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취미가 직업이 되면 그때 가서 우기자

김민식 2018. 01. 02
조회수 4213 추천수 0
어려서부터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한 제가 공대를 간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제 글씨가 알아보기 힘든 악필인데요. 아버지께서는 ‘그 필체로 문과에 갔다가는 굶어 죽기 딱 좋다’고 하셨어요. 교사로 평생 일한 아버지는 “선생이 아무리 잘 가르쳐도 강의 교안 글씨가 엉망이면 교장에게 인정받기 힘들어”라고 하셨지요. 1970~80년대 직장에서는 손글씨로 문서를 작성했기에 좋은 필체가 승진의 열쇠라고 하셨어요.

중학생 시절에는 서예학원의 펜글씨 반까지 다녔지만 끝내 글씨는 교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문과를 포기하고 이과를 갔는데요. 대학에서 석탄채굴학과 석유시추공학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어요. 살아보니 필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이 스물에 내가 불행한 건 아버지 탓인데, 나이 마흔에도 불행하다면 그것도 아버지 탓일까? 인생을 바꾸기 위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그때부터 전공 공부는 포기하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게 영어소설 읽기였고 미국 시트콤 시청이었어요. 통역대학원을 나와 피디가 되고 끝내는 작가라는 어릴 적 꿈을 이루었는데요. 아버지의 진로 지도 덕분이 아니라 저 자신의 즐거움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여전히 글씨체는 엉망이지만 책이나 칼럼을 쓰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서가 나오면서 손글씨를 대체했거든요. 정보화기기의 발달로 미래에 일자리가 줄어들까 걱정하는 분도 있는데요, 사라지는 일이 있다면 새로 생기는 일도 있을 겁니다. 남자에 비해 육체적 근력이 달리는 여성들에게 일자리가 늘어난 건 분명 기계와 로봇의 발달 덕분이거든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활약할 미래에 어떤 변화가 올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모든 정보를 휴대폰에서 찾을 수 있는 시대에 지식을 무조건 암기하는 게 옳을까? 영어 자동 통역기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돈과 시간을 들여 영어 조기 교육을 하는 게 옳을까?  답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답을 모를 때 저는 그냥 그 순간 즐거운 일을 합니다.

새해가 되면 영어를 공부하고 운동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지요. 저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냥 매일 아침 일어나 그날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가장 열심히 하며 삽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되고 그러면 취미가 직업으로 전환되기도 하거든요. 그럼 그때 가서 우기려고요. 처음부터 그게 목표였다고.
 
김민식.jpg » 김민식 피디의 두 딸이 몽고 테렐지 국립공원에서 보드게임을 하며 즐겁게 놀고 있다. 김 피디는 아이들에게 항상 지금 즐거운 일을 하라고 강조한다. 아이들은 아빠와 여행하면서 독서와 보드게임을 함께 즐긴다. 사진 김민식.
아이들이 어떤 세상을 살아갈지 알 수 없을 때, 저는 아이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주고 싶습니다.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기고 언젠가 꿈을 이룬다면 그때 가서 우기려고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 이게 원래 아빠의 육아 목표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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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SF 애호가 겸 번역가, 시트콤 덕후 겸 연출가, 드라마 매니아 겸 감독, 현재는 책벌레 겸 작가. 놀이를 직업으로 만드는 사람. 아이들의 미래도 놀이에 있다고 믿는 날라리 아빠.
이메일 : seinfeld6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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