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배.jpg


한달에 한 번 경남 합천의 한 암자에 가서 삼천배를 올린다는 지인의 얘기를

들은 것은 3주 전 쯤 이었다.

처음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삼천배라니.. 삼백배도 상상이 안 가는데

삼천배라니... 그러다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왜 삼천배를

하는거지? 어떤 것이 그(그들)를 삼천배를 하도록 이끄는거지?

그런 궁금증으로 지인과 얘기를 나누는데 그녀가 내게 권했다.

"언니도 삼천배 할 수 있어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예요.

23일 밤에 시작하는 삼천배에 가는데 언니도  같이 가실래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화들짝 놀랐지만 왠지 자꾸 삼천배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마음의 번뇌를 없애기 위한 자기 수행으로서 삼천배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순간 그 속에서 내가 같이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살다보면 한번쯤 진지하게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계기들이 생긴다.

크게 아프거나, 집안에 큰 일이 생기거나 할때 그런 마음이 들기 쉽지만

머지않아 쉰이 된다고 생각하니 부쩍 반백년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들이 차오르곤 하는데 이럴때 한 번 내 몸과 마음과 의지를 모두 다

끌어내어 감당해야 하는 일에 나 자신을 던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 안을 채우고 있는 헛된 욕망들을 싹 비워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곤 했다.

절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지극하게 낮춘다는 것인데 그렇게 삼천번 쯤

나를 낮추다 보면 헛된 욕망과 번뇌도 모두 빠져나가지 않을까. 그 고요함 속으로

어떤 것이 들어와 나를 가득 채울지 꼭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었다.


지인과 함께 집에서 절 하는 법을 배운 다음 108배를 한 번 수월하게 연습하고

12월 23일 오전 11시,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지인의 차에 올랐다.

경남 합천, 해인사 안에 있는 한 암자에 도착해서 일찍 저녁 공양을 하고,

오후 7시부터 절을 시작해서 천 배를 올리고 30분 쉬고,

800배 올리고 30분 쉬고, 600배 올린 후 휴식, 마지막으로 500배 올리고 마치면

새벽 3시가 되는 일정이었다. 내겐 엄청난 행군이었다.


평소에 일주일에 두 번씩 고강도의 근육 운동을 해 오고 있고,

늘 몸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며 많이 움직이는 습관이 있는터라 내심 해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었다.

그러나 막상 절이 시작되어 300배 쯤 넘어가니 온 몸의 근육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500배를 넘고 부터는 도대체 내가 왜 이것을 한다고 했을까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교만했구나.. 자신이나, 만만한 도전쯤으로 여기고 시작하는 일이 아닌 것을,

고도의 정성과 오랜 노력, 훈련, 간절한 마음과 자세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을

무슨 특이한 극기에 도전하는 것 같은 객기로 달려들었으니 이런 결과가 당연했다.

새삼 내 주위에서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온 몸이 땀에 젖은채로 입으로는 불경을 외우며 그들은 절을 하고 일어서 다시

몸을 숙이는 자세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 한결같음, 그 노력, 그 땀들속에

깃들어 있는 그 진짜 마음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나는 아니다. 이런 자세는 흉내 낸다고 될리가 없다.

이런 마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지로 억지로 천오백배를 채우고 나는 법당 벽으로 기어가 주저앉았다.

거기까지 해 낸 것도 내겐 기적이었다.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오전 7시에 암자를 떠나 다시 먼 길을 달려 집에 도착한 것은 24일 오전 11시였다. 집을 떠난지 24시간이 지난것 뿐인데 마치 꿈을 꾼 것 처럼 너무나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다리와 엉덩이, 허리와 등까지 온통 알이 배겨 제대로 움직일 수 도 없는 지경으로

돌아왔더니 크리스마스 이브다. 저녁엔 큰 언니네와 친정 남동생이 온다.

직장 다니며 어린 아이들 키우느라 늘 고단한 막내 여동생 가족도 우리집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지내고 싶다고 연락을 해 온다. 대학 다니는 큰 조카와

고등학생 작은 조카도 온단다. 갑자기 열네명 대식구를 맞아야했다.

두 시간 살짝 눈 붙이고 일어나 녹슨 몸처럼 삐걱대는 몸을 움직여 음식을

준비했다. 몸은 힘들어도 사실 너무 좋았다.

늘 애쓰는 막내 여동생네도, 기특한 조카들도, 늘 외로운 친정 남동생과

그 남동생을 누구보다 살뜰히 챙기는 언니네 부부에게도 내가 만든 따듯한

저녁밥을 먹이고 싶다. 그 생각만으로도 힘이 번쩍 난다.


2017 성탄절.jpg


식구들이 도착하고 나는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음식을 챙겼다.


2017 성탄절2.jpg


맛난 국물이 보글보글 끓는 속에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어 익혀 먹는 샤브샤브로

모두가 배부르고 행복한 저녁을 누렸다.


2017성탄절3.jpg


밤 늦도록 케익과 맥주를 먹으며 어른들은 이야기꽃을 피웠고,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일곱 명의 조카들은 온 방을 누비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없는 동안 세 아이를 챙기느라 애썼던 남편은 다시 많은 식구들을 위해

늦도록 벽 난로에 장작불을 활활 피워 주었다.


큰 언니네 부부는 밤 늦게 돌아갔지만 막내 여동생 가족과 조카들, 남동생은 하루

자고 가느라 성탄절 아침에도 대 가족 아침밥상을 차려야 했고, 그리고도 두 조카는

하루 종일 놀다가 저녁 늦게 돌아갔지만 마음은 내내 흐믓하고 뿌듯했다.


요양원으로 모신 시어머님 상태가 안 좋아 성탄절에도 요양원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는 쌍둥이 자매 대신 조카들에게 따듯하고 든든한 밥을 먹일 수 있었고

늘 일과 육아로 고단한 여동생 가족도 모처럼 여유있게 쉴 수 있었으며

단조롭고 외로운 일상을 보내는 남동생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즐거운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회사일로 바쁜 형부도, 언니도 이뻐하는 조카들 재롱 보면서 맛난 저녁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마음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 이모와 이모부, 사촌형과 동생들 사이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우리 세 아이들에게 최고로 좋은 크리스마스였으니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오늘에서야 조카까지 다 돌아가고 집안을 치우면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게 수행이란 이런게 아닐까.. 싶었다.

먼 청정도량에서 삼천배를 하는 일은 끝내 실패했지만

살아가면서 수시로 내 공간을 열어 사람들을 불러

잘 쉬고 잘 먹게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도 참 좋은 수행일지 모른다.

번뇌와 미움, 헛된 욕망은 여전히 내 안에 가득하지만 나는 내 번뇌도

오욕칠정도 사랑한다. 미워하고, 감동하고, 사랑하고, 원하고, 다시

반성하고, 또 희망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좋은 곳이 되기를 바라는 일에 마음을 내며

매일 매일 부지런히 글을 쓰게 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지인은 다음 번에 한 번 더 가면 꼭 삼천배를 할 수 있을거라고 나를 격려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삼천배에 도전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 삶 속에서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열어가며 내 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이 되고, 내 글과 삶이 혹 어떤 이의 마음에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애쓰며 사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면 족하다.


1월 1일엔 다시 우리집에 친정식구들이 스므명 넘게  모여 설을 보낼 것이다.

세 아이가 방학을 하면 각자 친구들을 왕창 불러 하룻밤 자며 신나게 놀 계획으로

들떠 있으니 나는 겨울 내내 여러번 수십명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 좋다.

나는 그런게 좋다.

이 집에 사는 동안 이 공간이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되는게

좋다. 그 일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내겠다.


한 달에 한번 삼천 배를 올리며 번뇌를 비우고 자신을 정신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 맑은 마음으로 분명 주변까지 환하게 물들일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수행은 아니라도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는 수많은 남편과 아내들, 학교에 가는

아이들, 일 하는 젊은이들과 어른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세상을 밝히는 부처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세상의 한 곳을 밝히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온 몸이 뻐근하지만 뭉쳐있던 근육은 조금씩 풀리고 있다.

다시 움직이고 글을 쓴다.

 

내년에도 움직이고 글을 쓰겠지.

삼십년, 사십년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럴 수 있는 삶을 꿈 꾼다.


천 오백배를 올렸던 마음으로 새해 첫날엔 부모님께 반듯한 새 절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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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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