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층은 넓은 정원을 가졌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무가 보인다. 나무는 말없이 사람들을 바라봐주고 지켜봐 준다. 그 생각을 하면 그저 나무가 고맙다. 그래서 새들도 곤충도 편한 나무 곁을 찾아가 쉬었다 가나보다. 들어주고 지켜봐 주니까. 시선에는 판단을 위한 관찰의 시선도 있고 관음적인 시선도 있을 테지만, 나무는 묵묵히 나와 아이를 바라봐주었다. 내가 화가 날 때에도, 상처를 받았을 때에도, 웃음을 지을 때에도, 아이와 카드 놀이를 할 때에도, 조용히 집 안을 바라봐준다.


며칠 전 나뭇가지 사이로 흰 눈이 흩날렸다. 어, 눈이 오네? 마흔이 넘어도 눈이 반갑다. 눈은 지난 추억과 함께 내린다.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쳐다봤다. 내가 아이만할 때엔 내리는 눈이 많아지면 장갑을 끼고 나가 언덕 위에서 눈을 굴렸다. 추억을 담은 눈의 계절이 온다. 12월. 한 해의 마지막 달이자, 12월의 첫 날. 12월 나무엔 반짝이는 옷이 걸리겠지, 크리스마스가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에도 크리스마스는 아침부터는 내 마음에 종소리를 울렸고, 하늘을 바라보면 산타클로스는 저 높이서 미소를 지은 채 썰매를 끌고 다녔다.

베이비트리_두 마음사이의 전쟁.jpg
(사진 : 픽사베이) 

 

마이크를 잡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일반인의 풍경을 담기에 바빴던 기자 시절 때의 크리스마스, 아내와 사별 뒤 삶에 적응을 하느라 다시 바빴던 지난 5년의 크리스마스. 아이가 10살이 되니 창 밖 나무를 바라보며 아직 오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꿈꿀 여유가 생겼다. 올 해의 크리스마스는 어떨까?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마트를 가겠지.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공연 하나를 볼까? 아빠로서 크리스마스는 아이를 위한 행사 준비로 바쁠 테지만, 마음 한 편이 허전했다. 크리스마스에도 아빠 노릇을 하는 구나 란 생각에.


벨벳 천이 깔린 식탁 위에 촛불을 켜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 나오는 레스토랑에 앉아 있으면 어떨까.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난 내가 그린 크리스마스 풍경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 맞은 편에 상상 속의 빈 의자가 보였다. 빈 의자 하나. 이번 크리스마스에 레스토랑에 앉아 있다면, 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정장 차림으로 미소를 띤 한 여성을 그려봤다. 정장이 잘 어울리고 책을 좋아하는 인상. 그러다 갑자기 매일 보는 얼굴이 떠올랐다. 상상 속에 빈 자리에 앉아 있는 여성은 사라지고 어느새 빨간 넥타이를 한 아이 얼굴이 보였다. 이런. 내 아이는 상상 속에서도 나타나 달콤한 상상을 깨뜨렸다.

크리스마스 식당.jpg
(사진 : 픽사베이)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평소와 다른 생각이 들면 나 스스로 내 마음 속으로 들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크리스마스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뭘까? 내 마음을 알기 위한 방법은 상상과 생각 속에 붙어 있는 감정을 찾아낼 때 가능했다. 마음은 머리가 아니라 감정이란 터널을 통해 들어가야 만날 수 있었다. 왜 내 앞에 빈 의자가 왜 보였을까. 그리고 갑자기 아이가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상담을 할 때처럼 내가 나에게 물었다. 지금 마음이 어떠니? 옷을 정리하는 손길처럼 내 마음을 하나씩 손으로 더듬어갔다. 외로움이 느껴졌다. 아이가 갑자기 나왔을 때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때엔 두려움이 있었다. 아이와 나와의 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내 마음 속엔 두 개의 감정이 그렇게 서로 싸웠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설렘과 아이와 관계가 혹여 깨질까 하는 두려움. 그 설렘과 두려움이 싸우면 결국 이기는 건 두려움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과 두려움은 내 마음 속에서 그렇게 다퉜다.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마음이 그 전쟁을 멈추는 일, 그건 두 감정을 모두 인정해주는 일이라고했다. 서로를 인정해 주면 전쟁은 끝날 테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사나 인간의 감정이나 꼭 닮았다. 그래 외로울 수밖에. 그래, 두려울 수밖에. 감정을 인정을 하는 것과 감정대로 행동하는 건 다르니까. 그렇게 내 감정을 인정을 해주면 외로움은 더 이상 두려움과 싸우지 않고 공존을 한다. 그러면서 다퉜던 감정은 나를 위로해 준다. 그래 외로울 수밖에. 그래, 두려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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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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