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직생활을 했던 학교는 졸업생 중에 연예인이 꽤 있다.
연예계 소식에 밝지 못한 내게도
정상급 배우와 가수로 활동하는 졸업생들의 소식이
종종 들려왔다.

 

교실 수업에서 만났던 학생 중 연예인이 된 아이들 세 명이 기억난다.
가수 휘성은 성실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에 바른 자세로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다.
축제 때 노래를 했다고 아이들이 알려주기도 했지만
재학 시절 휘성의 노래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수업하다 지루할 때 가끔 아이들에게 노래를 시키곤 했는데
그 아이는 나서지 않았다.
휘성이 가수로 유명해졌을 때
그런 끼가 있는지 전혀 몰랐던 터라 좀 놀랐다.

 

마찬가지로 배우 이완도 수업 시간에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가끔 싱긋 웃으며 내 말을 받아 농담을 했던 것이 기억날 뿐이다.
나중에 TV 화면에서 봤을 때 분위기가 달라져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학창시절엔 그야말로 수수하고 꾸밈없는 아이였는데
자신을 공들여 다듬을 줄 아는 연예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또 한 아이는 영화와 TV 시트콤에 출연한 친구다.
별명으로 불렀기 때문에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한 가지 우스운 사연이 있다.
녀석이 언젠가부터 복도에서 나를 만나면 ‘정양’이라고 놀리는 것이었다.
당시 섹시스타로 유명한 정양이란 예명의 배우가 있었는데
내 성이 정씨라는 이유로 그런 언사를 일삼았다.

 

복수를 꿈꾸던 중 희소식이 들렸다.
그 아이가 ‘몽정기’라는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는 거였다.
영화 내용을 알아볼 필요도 없이
제목이 아~주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난 그 애에게 ‘에로배우’라는 별명을 붙였고
다시는 정양이란 호칭을 듣지 않게 되었다.
한번의 장난끼 외엔 그 아이도 평범한 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들 모두 튀는 모습이 없었던 건
아마도 자신의 끼를 적절한 시점에 발휘하기까지
숙성시킬 줄 알았기 때문 아닐까 한다.

 

다엘이 또래보다 미숙한 것도
특별히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위안을 삼아본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면 1년 정도 늦춰서 중학교에 보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다엘이 2학년 동생에게 놀림 받았다고 징징대기에
이성을 잃고 쏘아붙인 적이 있다.
“아니 네가 몇 살인데 그러고 있는 거야?
너도 똑같이 놀리든가 아님 무시하든가!”
공감 아닌 훈계의 언어가 아이에게 독이 된다고 그토록 들었건만
내게서 튀어나온 말은 저급하기만 했다.

 

다엘이 항변했다.
“엄마는 위로는 안 해주고 그런 말만 해!
그러니까 나도 말하기 싫어지는 거야.”
이어서 아이가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랑 친한 경비 아저씨는 그런 말 안 해.
위로해주고 다 들어주니까 아저씨랑 얘기하면 편하다고.”

 

우리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 중 다엘이 매우 따르는 분이 있는데
인상 좋은 모습에 종종 다엘에게 과자를 쥐어주곤 하신다.
다엘은 자주 아저씨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순찰 때도 따라다녔다.
한번은 아저씨와 전화 통화를 하는 다엘의 말투가 매우 조심스럽길래
내가 물었다.
“아저씨랑 친하다면서 말투가 엄청 공손하네?”

 

다엘은 뜻밖의 답을 했다.
“아저씨는 나한테 더 공손하신걸!”
나중에 아저씨의 전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
아이에게 정이 가득 담긴 존댓말을 섞어 대화를 나누시곤 했다.

 

아, 경비 아저씨는 혹시 강호의 숨은 고수가 아닐까?
육아의 고수 말이다.
어린 친구의 수다를 한없이 받아주고
아이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성장을 평화롭게 기다려주는….

 

청소하는 아저씨.jpg » 다엘이 따르는 경비 아저씨.


나는 부모로서 다엘의 미숙함, 평범함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돌이켜봤다.
느긋이 기다려주기는커녕
내가 동경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투사하여
피아노 연주를 멋있게 하거나 스포츠 방면에 뛰어난 활약을 하는 등의 상상을 하며
내일의 반전을 꿈 꾸곤 했다.
아들을 통해 내 욕심을 채우려 한 것이다.

 

말로는 다엘의 행복이 제일이라 하면서
속으로는 세상을 평정하는 대단한 인물이 되길,
누구나 부러워하는 멋진 청년으로 자라기를
은밀히 꿈꿔온 게 아닌지 나 자신을 파헤쳐 본다.

 

다엘이 눈부신 이름과 재능을 자랑하지 않더라도,
남보다 늦되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자신만의 소박한 길을 택하더라도,
그 또한 열렬히 응원하리라 다짐한다.

 

그 누구도 아닌 다엘 자신이어서 엄마에겐 자랑스런 존재임을,
아들에게 가슴으로 전해줘야지.

 

다엘의 경주여행.jpg » 학교여행을 떠난 다엘. 맨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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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딸이 뇌종양으로 숨진 후 다시 비혼이 되었다. 이후 아들을 입양하여 달콤쌉싸름한 육아 중이다. 공교육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시민단체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의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산지역의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편견을 없애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초등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대안교육 현장의 진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이메일 : juin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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