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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그린 커다란 나무>


높은 곳에 올라 고개를 빼고 내다보면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도시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이 있는 골목길을 빠져 나와 가파른 길을 올라서면, 고개길 중턱에 세 개의 여고, 두 개의 남고가 줄줄이 서 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웃 두 도시와 병합되어 이름마저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 곳이지만, 창 밖을 내다보면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보낸 열 일곱, 열 여덟의 그 시간들만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초저녁 무렵 버스를 타고 그 길을 지나며 해질 무렵의 바다를 바라볼 땐 어딘지 모를 아련함을, 풍물 동아리 연습이 끝나고 친구들과 해진 후 바닷가 등대를 찾을 땐 또 어딘지 모를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비록 밝을 때 가까이서 보면 더럽기 그지없었던, 비린내 폴폴 나는 어시장 한복판을 가로질러 들어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던 초라한 바다였지만, 그래도 그 바다가 좋았습니다.

 

3 수험생 시절엔 연애도 동아리도 다 관두고 공부만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자의 반, 타의 반 연애와 동아리를 모두 관두고서도 공부만 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침 0교시부터 밤늦도록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어두운 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며 하루 종일 바닷가 쪽으로 몸 한번 돌려보지 못한 걸 아쉬워했습니다. 3 시절을 보낸 교실은 바닷가가 보이지 않는, 운동장 쪽에 면해 있었거든요. 아이들이 점심, 저녁 식사 후 주로 찾는 곳이 정문 옆 등나무 벤치나 별관으로 통하는 구름다리였던 건 어쩌면 그 아이들 역시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북적이는 구름다리나 등나무 벤치가 싫었던 저는 아이들이 거의 오지 않는 일요일,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바닷가 쪽을 면하고 있는 자습실에 조용히 혼자 처박혀 있다 보면 공부를 하는 시간보단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았지요. 생의 무게가 너무나도 버거워 힘이 들 때, 자꾸만 고개를 드는 죽음에 대한 갈망을 억눌러야 할 때, 가끔은 자습실에서 뛰쳐나와 비린내 진동하는 어시장을 꾸역꾸역 걸어 내려가 바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일부러 학교 가는 길목, 작은 시장통을 가로질러 언덕길을 오르면서 아침을 맞느라 분주한 시장 사람들 뒤로 내다보이는 바다를 만났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입시 스트레스에 묻혀버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소피가 나무 위에 올라 멀리 바다를 내다보는 그림을 보며,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When Sophie Gets Angry, Really, Really Angry)의 주인공 소피는 동생에게 장난감을 빼앗기고 엄마에게 혼까지 나는 바람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소피는 얼굴을 붉히며 불 뿜는 화산처럼 분노합니다. 손끝에 무언가 닿기라도 하면 모조리 부수어버릴 것만 같았지요.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소피는 결국 문을 박차고 집을 뛰쳐나갑니다. 우다다다다, 발 닿는 대로 마구 달려가던 소피가 가 닿은 곳은 한적한 숲 속. 그 고요한 숲의 한 가운데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소피는 망설임 없이 곧장 그 나무에 오릅니다. 성큼 성큼 나무를 올라 커다란 나무 둥치 옆으로 난 튼튼한 가지에 걸터앉으니 눈 앞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다름 아닌 넓고 푸른 바다. 파도와 바람이 넘실대는 바다는 조금 전까지 뜨거운 화산처럼 폭발하던 소피의 마음을 조용히 달래줍니다.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 소피는,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나무를 딛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지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따뜻한 기운이, 좋은 냄새가 성큼 다가옵니다. 엄마도, 아빠도, 아까 소피를 그렇게 화 나게 했던 동생도, 웃으며 소피를 반깁니다.

 

바다를, 바다 내음을, 바다의 소리와 빛깔을 좋아하는 저는 소피가 나무에 걸터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며 제 인생의 또 다른 장면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집안의 여러가지 일들과 보이지 않는 미래와 잘 풀리지 않는 이런 저런 생각들로 복잡하던 때. 남편은 저를 데리고 강원도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투덜투덜, 가는 내내 표정도 말투도 좋지 않던 사람이 바다를 보자마자 단번에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란 남편은 그 이후로 종종 그 때 일을 얘기하곤 하지요. 선물을 해도, 좋은 구경을 해도 웬만해선 좋아하는 기색을 잘 보이지 않던 저에게, 바다는 도무지 웃지 않을래야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신비한 존재였습니다.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위에 올라서서 내려다 볼 바다가 근처에 있다면 그걸 이유 삼아 꾸역꾸역 산을 오르기도 했지요. 미국 중부 시골로 이주해 온 지 6. 가끔, 아니… ‘가끔이라기엔 좀 자주, 그 바다가 그립습니다. 바다의 향기, , 바람에 묻어나는 소금기, 잔 파도 소리. 바다는커녕 산도 한 자락 없는 이 곳에서 늘 그리는 것이 바로 그 바다입니다. 그건 분명, 열 일곱, 열 여덟 그 때의 바다가 마음 깊은 곳에 남았기 때문일 겁니다.

 

산도 바다도 큰 물도 없는, 넓게 펼쳐진 것이라곤 옥수수밭과 콩밭 뿐인 이 곳에서 그래도 이만큼이나마 살아가고 있는 건, 그나마 높고 커다란 나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여기저기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숲을 거닐 수 있거든요. 등산을 하지 않고도 산 속 깊은 곳에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이 곳의 숲들은, 우리 세 식구가 휴일에 김밥을 싸들고 종종 찾는 나들이 장소가 되었습니다. 숲을 다니다 보면 이 곳의 아이들이 숲 속에서 어떻게 노는지를 보게 되는데, 나무 둥치에 올라 걸터앉거나 매달리는 장면 뿐 아니라 숲에서 캠핑을 한 흔적, 나무들 사이에 해먹을 걸어두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종종 봅니다. 아마 소피의 이야기도, 그런 자연 환경 덕분에 탄생한 얘기였겠지요. 소피가 동생과 다투고 엄마에게 혼이 난 다음 끝내 그 화를 풀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최근 많이 회자되고 있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 또래 아이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건 어쩌면 아이들이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화를 꺼내놓지 못하고 분노를 쌓아 올려가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는 시간을, 그런 환경을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울 때, 무언가에 좌절하고 분노했을 때, 잠시라도 마음을 달래 줄 공간, 고요한 풍경이 근처에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잠시 쉬었다 다시 힘을 얻습니다. 누군가에겐 바다가, 누군가에겐 산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숲이, 하늘이, 들판이, 꽃밭이 그런 풍경일 수 있겠지요. 다른 것 따질 필요 없이 힘껏 마음껏 내달릴 수 있는 운동장이라도 있다면,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거꾸로 매달려 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마음대로 뒤집었다 제자리에 놓았다 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화가 나고 절망에 휩싸였을 때 오를 수 있는 나무가 주변에 없어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친구들과 운동장에, 놀이터에 남아 마구 내달리고 뒹굴며 마음을 풀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들 아파트 옥상을, 높은 건물을, 집 베란다를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누군가를 붙들고 공터를, 노래방을 다니며 발길질로, 욕설로, 그 분노를 쏟아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나 커다란 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 올라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 나무 위에서 조금 멀리 내다봤을 때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이 아니라 바다가, 산이, 하늘이 보인다면, 아이들은 조금 더 숨통 틔우며 살 수 있을까요? 조금만 휘청, 해도 위험천만한 높은 아파트, 높은 빌딩 대신, 커다란 나무가 그 아이들 가까이에 있다면,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 먼 곳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나무 둥치를 타고 다시 내려와 보드라운 흙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요


화산 같이 터져오르는 마음을 안고 마구 내달리는 소피의 모습을 보며, 그 마음을 잔혹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을 몰랐던 아이들이 생각나 참담해졌습니다. 소피가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한 발, 한 발 나무에서 내려와 저벅저벅 숲길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옥상에서, 베란다에서 그 깊고 무서운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딛었을, 아깝고 귀한 목숨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들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아이들을 다시 일어서게, 살게 하는 힘. 우린 어디서 그런 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세상 곳곳에 우리 아이들이 발 딛고 오를 튼튼하고 커다란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 그래서 아이들이 그 나무에 올라 웃고 울고, 그 나무에 매달려 한참을 놀다 내려올 수 있도록 그런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 같습니다


--

같이 읽어요.


원서: When Sophie Gets Angry, Really, Really Angry

번역서: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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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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