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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넓고 사람 많은 이 곳에서, 자동차는 필수품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지난 6, 차 없이도 그럭저럭 살만했습니다. 적어도 큰 대학 캠퍼스를 끼고 있는 우리 동네는 자전거 도로와 시내 버스 운행 시스템이 제법 편리하게 갖춰진 편이거든요. 비록 30분에 한 대씩 다니는 버스를 그늘 한 줌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혹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쌓인 풀밭 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고되고 힘들 때가 많았지만요. 그래도 고마운 주변 사람들 덕분에 한겨울에 장을 보러 갈 때나 부피 큰 물건을 사야 할 땐 차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차를 얻어 타고 필요한 업무를 편리하게 처리하다보면, '이래서 모두들 차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 처지이다 보니, 한편으로는 차 없이는 '못 산다'는 표현에 묘한 거부감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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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그린 '버스, 엄마, 나'>


버스를 타고 강 건너 옆 동네에만 가봐도, 차를 타고 이동할 때와는 달리 삶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면면입니다. 강 건너 다운타운 환승센터에 버스가 도착하면, 우리 동네에선 자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버스를 채웁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가방에 산소통을 넣고 코 밑에 줄을 달아 가쁜 호흡을 유지하는 할머니,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타는 노숙인, 영어를 말할 줄 모르는, 중남미에서 온 이민자들, 유모차에 갓난 아이를 태운 아이 엄마, 그리고 할 일 없이 동네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는, 큰 소리로 음악을 듣거나 욕설이 섞인 대화를 나누다 버스 기사에게 경고를 받는 흑인 청년들까지, 우리 아이 눈에 낯선 이들이 한데 섞여 듭니다.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섞인 공간에서, 아이는 아이대로,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못 이겨 질문을 던져대기도 합니다. 아이는 휠체어를 보고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저런 의자에 앉아 있어?”하고 엄마에게 묻고, 맞은 편의 흑인 할아버지는 한눈에 보아도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오른 발과 다리를 가진 우리 아이를 쓰윽 훑어보다 “What happened to his leg?”(거 애 다리가 왜 그래요?) 하고 묻는 거죠.  이렇게 짧은 질문과 답이 교차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세상엔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심한 듯하면서도 서로를 궁금해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이렇게 자동차가 필수품에 가까운 곳에서, 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만큼 외롭기도 하다는 것을요.

 

다운타운 환승센터에서 같은 버스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장소에서 내리고 탑니다. 한때는 북적였을, 그러나 지금은 버려지다시피 한 쇠락한 다운타운 한복판에 서 있는 한 건물.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져 흉물스러운 이 건물은 소득이 없거나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 세를 주고 정부 보조금을 지원 받는 아파트입니다. 이 앞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서성거리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담배를 한 대 피우거나 커다란 페트병에 든 콜라를 들이키며 시간을 때웁니다. 다시 출발한 버스가 골목을 돌아 멈춰서는 곳은 커다란 교회 건물. 커다란 건물 옆구리에 난 작은 입구 앞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특정 요일, 특정 시간대에만 문을 여는 이 작은 입구는 식량을 구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담아 줄 자원활동가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커다란 종이 봉투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 이미 기한이 지난 통조림, 언제부터 얼렸는지 알 수도 없는 꽁꽁 얼린 고기, 주스와 도넛, 상하고 멍 들어 물러져버린 토마토, 사과 따위를 담아 가면서요. 이주 초기, 식료품에 들어가는 돈 몇 푼 아껴보려고 그곳을 드나든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세계 강대국이라는 곳에서, 수천 평짜리 건물 가득 식료품이 들어찬 마트가 곳곳에 있는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받으러 이렇게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지를요.

 

하지만 이 땅의 모순에 이미 익숙해진 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어떤 의문도 분노도 희망도 절망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몸짓으로, 때로는 세상 걱정 없다는 듯 유쾌하게, 하릴없이 줄을 서서 교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받은 음식을 가방에 한 짐 얹어 매고, 다시 버스를 타고, 혹은 걸어서, 혹은 낡은 차를 나눠 타고 또다시 어딘가로 향합니다. 그림책 <마켓 스트리트 마지막 정류장>(Last Stop on Market Street)에 등장하는 마지막 정류장이 바로 이 사람들의 다음 목적지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한 자리에 모여 한끼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 줄을 서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또 한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면서도, 사람들은 내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나절 동안 있었던 일을 공유하느라 시끌벅적한 그곳은 바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입니다


할머니 손을 잡고 마켓 스트리트의 마지막 정류장에 있는 무료 급식소까지 가는 길, 꼬마 CJ의 눈이 닿는 풍경은 바로 이 곳의 가난한 거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CJ가 "왜 우리는 차가 없느냐"고 할머니에게 물을 때, 똑같은 질문을 하던 두 살, 세 살적 우리 아이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 CJ가 "저 사람은 왜 앞이 안 보이냐"고 물을 땐 우리와 함께 버스를 타고 내리던 휠체어 탄 아저씨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골목길을 걸으며 CJ와 할머니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선, 바로 이 곳 다운타운의 더러운 골목길을 걸으며 과연 그 골목에도 서글픔이나 슬픔, 분노나 무기력 외에 다른 감정들이 있을까 궁금해 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도 배급소나 급식소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도 농담이 오고 가고, 박장대소가 오가는 걸 보며 사람으로 산다는 건 역시, 때로는 버티고 때로는 웃어 넘기며 하루 하루 각자의 일상을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마켓 스트리트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 그림책에서 보여주고 싶은 모습도, 아마 그런 걸 겁니다. 이 세상 가장 아래, 가장 구석진 곳에서 근근히 생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일상이란 것이 있고,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으로 끼니를 잇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타인에게 손 내밀 수 있는 마음이란게 있다는 것.   


지난 해, 무료 급식소에서 일일 배식 자원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리실에서 방금 나온 따뜻한 식사와, 아이스크림, 요거트 따위를 디저트로 배식하고 어색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며, 이 사람들은 어떤 사연으로 매일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이방인인 내가 어떻게 비쳐질 지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아이와 동네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늘 같은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이름 한 번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도 실은 그래서였지요그러던 어느 날, 매일 아침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던 어느 할머니에게 어디에 사시느냐고 물었다가 뜻밖에도 할머니가 노숙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할머니를 더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지 궁금했지만, 알아볼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에겐 첫 번째 자동차가 생겼습니다. 빨간색 98년 혼다 자동차. 낡았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우리 집 첫 자동차에 우리 세 식구 몸을 싣던 날에도, 우리 곁으로는 매일 똑같은 사람들을 똑같은 장소로 데려다주는 버스들이 부릉부릉, 스쳐 지나갔습니다.


자동차가 생기고 나니, 그동안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분주히 오갔던 그 길이 새삼 생경하게 다가옵니다. 자동차가 생겨 몸이 편해진 만큼, 그 버스 안팎 고단하고 서글픈 삶의 풍경들, 그 버스를 함께 탔던 사람들의 모습을 금세 잊게 될까봐 겁이 나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선들로 무수히 구획지어진 우리의 세계를 모른척 하게 될까봐, 내 삶이 편안해질수록 그 선들이 더 보이지 않게 될까봐 두려운 하루가, 오늘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아이 없이 버스를 타면 아이의 안부까지 챙겨 물어주던 버스 기사님도, 뭐라도 도움이 되고픈 마음에 우리 아이 병명을 물어 의학자료를 손수 프린트 해서 쥐어주던 얼 아저씨도,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 노숙인 할머니도, 우리 세 식구 삶에 점 하나, 선 하나 보태주었음을, 아이도 우리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언젠간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늘 이 거리를, 그 버스를, 사람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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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Last Stop on Market Street (Matt De La Pena / Christian Robinson)

번역서: 행복을 나르는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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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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