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교육

육아엔 ‘대기 발령’이 없다

김민식 2017. 08. 09
조회수 2820 추천수 1
512.jpg » 김민식 피디는 나이 마흔에 늦둥이 둘째딸을 낳았다. 사진은 딸이 신생아 때 등에 업고 빨래를 너는 모습. 김민식씨 제공. 문화방송(MBC)에서 드라마 피디로 일하는 저는 “김장겸은 물러나라”고 외쳤다가 한 달간 자택 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대기 발령 기간 동안 일하는 아내 대신 아이들을 돌보았는데요. 한 달 동안 육아의 어려움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일단 아침 차리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고등학생인 큰아이가 오전 6시50분에 밥을 먹고,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는 7시 반에 아침을 먹습니다. 큰아이는 김치찌개를 좋아하고, 둘째는 된장찌개를 선호합니다. 친척 누나가 전날 만들어주신 두 가지 찌개를 끓여서 내놓습니다. 큰아이는 계란을 앞뒤로 뒤집어서 완숙한 것을 좋아하고, 막내는 노른자가 흰자와 섞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계란 프라이에도 정교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큰아이랑 아침을 먹기 시작합니다. 이때 저의 역할은 ‘눈치껏 블로킹’입니다. 둘째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요령껏 남겨야 합니다. 반찬을 기껏 빼돌렸는데 둘째가 먹지 않는 경우, 허탈합니다. 남은 음식을 버리기가 아깝더라고요. 결국 저의 역할은 잔반 처리입니다. 영업사원들이 접대를 위해 점심을 두 번 먹는다더니, 육아하는 아빠도 아침을 두 번 먹습니다. 살림 사는 주부들의 체중 관리가 왜 힘든지 실감했어요.

2012년 문화방송 170일 파업 당시 저는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했습니다. 파업 이후 5년간 회사에서 제게 드라마 연출을 맡기지 않았어요. 밤샘 촬영 대신 살림을 살면서 육아에 대해 나름 안다고 생각했는데요. 자택 대기 발령 동안 다시금 깨닫고 있어요. 육아는 정말 어려워요. 직장 근무는 퇴근이 있는데 육아는 24시간 근무입니다. 요리사가 되어 밥을 차리고, 학습지 교사가 되어 숙제 검사를 하고, 놀이방 친구가 되어 보드게임을 하고, 동화 구연가가 되어 책을 읽어주고, 아이가 잠들면 겨우 퇴근인가 싶은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 “모기가 있어!” 하면 방역요원이 되어 다시 출근합니다. 육아는 끝이 없어요.
 
대기 발령 나고 처음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느꼈는데, 며칠 되지 않아 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드라마 피디로 일하면서 밤샘 촬영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인 줄 알았는데, 육아가 더 힘들더라고요. 회사로 복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자신을 보며, ‘아, 난 내가 좋은 아빠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하면서 우울해했어요. 그때 만난 후배 피디가 그러더라고요. 출산 후 육아가 너무 힘들어 산후 우울증이 심했다고. 출산과 모유 수유가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고. 그나마 일터로 복귀할 수 있다는 생각에 휴직이 끝나기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때 ‘이렇게 예쁜 아기를 두고, 난 참 나쁜 엄마네’ 하고 많이 우울했다고 하더라고요.

고민입니다. 어설프게 육아에 발만 담근 아빠가 감히 육아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육아가 정말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육아의 첫걸음이 아닐까 싶어요.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김민식
SF 애호가 겸 번역가, 시트콤 덕후 겸 연출가, 드라마 매니아 겸 감독, 현재는 책벌레 겸 작가. 놀이를 직업으로 만드는 사람. 아이들의 미래도 놀이에 있다고 믿는 날라리 아빠.
이메일 : seinfeld68@gmail.com      

최신글




  • 학교, 학원, 숙제…, 잠 좀 푹 잘 수 있게학교, 학원, 숙제…, 잠 좀 푹 잘 수 있게

    김민식 | 2018. 05. 23

     요즘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오는 5월26일 토요일 저녁에 첫 방송이 나갈 문화방송(MBC) 주말특별기획 <이별이 떠났다>입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건 즐거운 작업이지만, 나름의 고충이 있어요. 바로 수면 부족입니다.  드...

  • 한가한 일상의 경이로움, 뜻밖의 선물한가한 일상의 경이로움, 뜻밖의 선물

    김민식 | 2018. 04. 24

     큰딸 민지가 여덟살 때, 제가 일하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 놀러 온 적이 있어요.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본 아이에게 감상을 물었어요. 어린 민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빠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움직이고, 다시 뭐라고 하면 사람들이 멈추...

  • 지식과 기술의 시대 넘어 이젠 태도지식과 기술의 시대 넘어 이젠 태도

    김민식 | 2018. 03. 28

    텔레비전 피디(PD)로 20년 넘게 일하면서 인기 프로그램의 트렌드를 살펴보았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역량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어요. 우선 역량이란 지식과 기술과 태도의 합인데요,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

  • 사랑하는 두  여인에게 동시 점수 딸 기회사랑하는 두 여인에게 동시 점수 딸 기회

    김민식 | 2018. 02. 27

    5년 전, 어린이 독서 운동을 이끄는 도서관장을 만나 여쭤봤어요. “아이에게 물려줄 재산은 딱히 없고요. 책 읽는 습관을 물려주는 게 꿈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매일 밤 아이가 잠들기 전 30분씩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세...

  • 기다리는 것도 실력이다기다리는 것도 실력이다

    김민식 | 2018. 01. 31

    집에서 설거지는 제 담당인데, 시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밥을 먹고 과일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휴대폰을 보면서 천천히 음악 재생 목록을 고릅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흥겹게 설거지를 하거든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흥이 깨지면...